"잉글랜드 왕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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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년 장남 아서(당시 15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왕세자의 거주지를 밖에 두는 전통에 따라 러들로 캐슬로 나간 5개월 후 1502년 사망한다. 이에 낙담한 헨리 7세는 슬픔에 잠겨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왕위계승에 대한 걱정으로 황폐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왕에게 헨리 7세 자신도 외동아들이지만 살아남아 왕이 되었고, 부부에게는 아직 아들과 두 딸이 남아있으며, 둘 다 아직 젊으니 아기를 더 낳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위로했다.
 
[[1503년]] [[2월 2일]] 막내딸 캐서린 공주를 낳고낳았지만 (며칠 후 사망)사망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생일인 [[2월 11일]] 에 분만후감염<ref> 흔히 이가 산욕열(Puerperal Fever)로인해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 분만후감염(Postpartum Infection)이었다</ref>으로 37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남편인 헨리 7세는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은둔지로 몰래 떠나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검소하다고 소문난 헨리7세 였지만 그녀를 위해 화려한 장례식을 열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묻혔다.
 
헨리 7세는 나중에 나폴리 왕의 미망인인 조안나, 카스티아의 여왕 [[후아나 1세|후아나 1세(카스티야)]], 사보이의 공작 미망인 마가렛 등과 재혼을 생각했지만 1509년 홀로 사망했다. 당시의 세금 징수 기록 등을 보면, 엘리자베스의 사망 이후 헨리 7세의 인색함과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인한 악명은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매장되었다. 엘리자베스의 무덤은 19세기에 발굴작업을 거쳤는데, 납으로 된 관을 덮었던 나무 상자를 후손인 제임스 6세를 묻을 장소를 만드느라 없애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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