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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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 ?
|자녀 = ?
|부왕 = [[유리명왕]](瑠璃明王)<br/>[[대무신왕]](大武神王)
|모후 = 왕후 송씨(王后 松氏)<br/> ?
|전임자 = [[대무신왕]](大武神王)
|후임자 = [[모본왕]](慕本王)
|묘호 = 중종 (강희제가 추존)
|시호 = 민중왕, 가천덕광무민중효문황제 (요태종이 추존)
|종교 = [[샤머니즘]]
|가문 = [[횡성 고씨|횡성]](橫城)
|왕조 = [[고구려]](高句麗)
|연호 =
|목록 = [[고구려의 역대 국왕|고구려의 제4대 국왕]]
 
== 생애 ==
《[[삼국사기]]》에는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로 나와 있고, 《[[삼국유사]]》에는 [[대무신왕]]의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대무신왕이 죽은 뒤 태자 [[고구려 모본왕|해우]](解憂)가 어리므로 대신 왕으로모본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 한다.
 
44년 음력 10월 보위 등극하였고 그해([[44년]]) 음력 11월에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 음력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음력 5월에는 나라 동쪽에서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47년]]에 사냥을 나간 민중왕은 민중원(閔中原)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음력 10월에는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인 [[대승 (인물)|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한나라|한]](漢)의 [[낙랑]]으로 투항하였다. [[48년]]에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묻힌 민중원의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
 
민중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없다.
 
== 각주 ==
{{각주}}
<references/>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