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정치인 정보
|이름 = 이병철<br/>李秉喆
|출생일 = 1909년 음력 2월 12일{{출생일|1910|2|12}}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87|11|19|19091910|2|12}}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본관 = [[경주 이씨|경주]](慶州)
22번째 줄:
[http://www.samsungfoundation.org/ 삼성재단]
}}
'''이병철'''(李秉喆, [[1909년1910년]] [[음력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삼성그룹]]과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CJ제일제당|제일제당]]과 [[제일모직 (1954년)|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30번째 줄:
== 생애 ==
=== 생애 초기 ===
이병철은 1909년 음력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군|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시|진주]]에 뿌리를 내렸다.<ref>삼성가는 경주 이씨(慶州李氏) 판전공(判典公)의 후손이다. 판전공파(判典公派)후 눌(訥)사정공(司正公)후 일신(日新)후로써, 계번(桂蕃)이 처음으로 의령에 뿌리를 내린후 문산(文山)선생 휘 홍석(洪錫, 건희 회장의 증조부), 述山(술산) 휘 찬우(纘雨, 건희 회장의 조부), 학산(學山) 휘 적우(績雨) 등이 구한말에 진주지역의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ref> 12대조 유(宥)가 승정원 좌승지, 6대조 태운(泰運)이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조부 홍석(洪錫) 대에 천석의 부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하고 영남의 거유라는 허성재(許性齋)의 문하로 인근에 알려진 유림이며 시문에 능하였다. 부 찬우(纘雨)는 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군|의령]]과 [[진주시|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ref>경주이씨 대동보 총편 1 판전공파편 162쪽의 2, 경주이씨 대동보 총편 2 판전공파편 42쪽, 경주이씨 대동보 권지 22 판전공파편 사정공파 179쪽 39쪽 (경주이씨대동보편찬위원회 1978년 인쇄)</ref><ref>경주이씨 대종보 총편 281쪽, 경주이씨 대종보 권지 38 판전공파편 전 122쪽 51쪽 29쪽 27쪽 (경주이씨중앙화수회 1987년 인쇄)</ref>
621번째 줄:
 
[[분류:이병철| ]]
[[분류:1909년1910년 태어남]]
[[분류:1987년 죽음]]
[[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