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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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
인천은 [[원삼국시대]]에 [[미추홀]](彌鄒忽)로 불렸으며 비류 십제의 도읍지이기도 하였다. 미추홀이란 이름은 물가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뭇골, 또는 거친 들판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맷골의 음차라는 해석이 있다. [[십제]]의 [[온조왕|온조]](溫祚)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의 영토였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장수대왕]](長壽大王)이 백제를 공격하면서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 일대에 매소홀현(買召忽縣)을 설치하였다. [[6세기]] 중반 [[신라]]의 [[진흥왕|진흥대왕]](眞興大王)이 점령하여 신라에 편입되어, [[10세기]]까지 약 400년간 [[신라]]의신라의 영토로 활약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삼국통일]] 이후인 [[757년]](신라 [[경덕왕|경덕대왕]] 16년)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됐다.
 
=== 고려시대 ===
소성현은 [[고려]] 때에는 수주(樹州)에 속했다가 [[1105년]]([[고려 숙종|숙종]] 10년), [[고려 문종|문종]](文宗)의 왕비이자 [[고려 순종|순종]](純宗), [[고려 선종|선종]](宣宗), [[고려 숙종|숙종]](肅宗), [[의천|대각국사 의천]](義天)을 비롯한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생산한 [[인예태후|인예태후 이씨]](仁睿太后 李氏)의 외향이라 하여 경사의 근원지를 뜻하는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7대 국왕 [[고려 인종|인종]](仁宗) 역시 어머니 [[순덕왕후|문경태후 이씨]](文敬太后 李氏)의 친정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재승격시켰으며, [[1390년]]([[고려 공양왕|공양왕]] 2년),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 경원부(慶源府)로 개칭되었는데, 문종조에서 인종조까지 7대에 이르는 동안 [[인천 이씨|인주이씨]] 집안에서 다섯 왕비([[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 [[사숙왕후]], [[순덕왕후]])가 나왔고, 다섯 임금([[고려 순종|순종]], [[고려 선종|선종]], [[고려 헌종|헌종]], [[고려 숙종|숙종]], [[고려 인종|인종]])이 인주이씨 왕비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이르러 [[고려-몽골 전쟁|몽골제국이 고려를 침입]]하자, 1232년(고려 고종 19년) 고려 정부는 수도를 [[개경(開京)]]에서 [[강화군|강화도]](江華島)로 천도하여 항쟁하였다. 이 시기 고려는 강화도에서 부처의 힘으로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다. 강화는 강도(江都)로 불리며 1270년(고려 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개경 환도 이후 발생한 [[삼별초의 난]] 시기에는 삼별초가 안남도호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강화도에 강화 고려궁지이 세워지자 많은 변화가 있게 되었는데, 왕궁과 성곽이 들어서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지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간척|간척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강화도의 면적은 크게 확장되었으며 본래 두 개의 섬이었던 강화도는 하나의 섬이 되었다.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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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조선 태조]] 1년) 인주로 격하된 후, [[1413년]]([[조선 태종|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지는 도호부 이하의 군·현 명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함으로, 인천이라는 이름이 태어났고, 이 날(1413년 10월 15일)에서 유래하여 매년 [[10월 15일]]을 '인천 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460년]]([[조선 세조|세조]] 6년) [[조선 세종|세종]](世宗)비 [[소헌왕후|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외향이라 하여 인천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고 이듬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약 내용에 의해 [[부산광역시|부산]](釜山), [[원산시|원산]](元山)과 함께 개항이 결정되었으며, [[1883년]]([[대한제국 고종|고종]] 20년) [[제물포]] 개항으로 제물포에 인천감리서가 설치되면서 사실상의 읍치가 관교동에서 제물포로 이전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갑오개혁]]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전국을 [[이십삼부|23부]]로 개편하여 인천부(仁川府)가 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다시 경기도 인천부가 되었다. 지금의 학익동, 문학동, 관교동, 선학동 일대를 포괄하던 인천부 부내면은 [[1906년]] 인천부 구읍면으로 개칭되었고, 부내면의 이름은 당시 다소면의 일부였던 개항장(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광역시)|중구]])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