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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정 환경 ====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이식(李埴)<ref> [[의정부]][[좌찬성]]에 증직됨</ref>과 부인 [[의성 김씨|문소 김씨]](2남 1녀) [[춘천 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 (이름)|자]]는 경호(景浩), [[호 (이름)|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u>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u>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이황이 태어날 때 이황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ref>{{웹 인용 |url=http://www.kyobo.co.kr/sabo/sabo7031.html |제목=역사인물 기행:퇴계 이황 |확인날짜=2011-05-2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1107134018/http://www.kyobo.co.kr/sabo/sabo7031.html |보존날짜=2007-11-07 |url-status=dead }}</ref>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 (1496년)|이해]](李瀣)로 인해 역시마찬가지로 학자였으나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연루되어 유배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일찍이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다. 상처한 후 우연히 그의 사람됨을 본 [[권질(權瓆)]]이 병약한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고 청하자,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권질의 딸을 받아들였다. 권질의 딸은 정신질환이 있었는데, 후일 20세기의 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권씨 부인을 요즘 유행하는 말인 사이코패스를 줄인 사이코라고[[사이코]]라고 표현하였다. 그 외에도 퇴계에게는 첩이 1명 있었으나 첩도 서자 1명을 낳고 일찍 요절하였다. 퇴계는 본부인 허씨 소생 자녀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도록 가르쳤고, 이에 권씨 부인이 사망한 뒤에도 자녀들은 권씨 부인의 3년상을 시묘살이하였다.
 
==== 수학 ====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하였다. [[1508년]](중종 3) 8세 때 중형(仲兄) 이징(李澄)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형제들 중 그만 이를 보고 통곡을 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1512년(중종 7)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송재는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친히 조카 퇴계를 비롯한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514년(중종 9)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과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숙부 이우에게 수학한 뒤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하였고, [[1520년]](중종 15)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는데, 이후부터 그는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 결혼과 가정 생활 ====
[[1528년]](중종 23) 퇴계가 28세 때, 부인허씨는 둘째 아들을 낳고 1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비록 아내는 죽었으나 사위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된 장모를 도와 그가 죽을 때까지 처가집의 대소사를 끝까지 챙겼다.<ref>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 27쪽</ref> 당면한 학문에 전념하면서 어린 두 자녀를 돌보는 것은 무리가 따랐지만, 사정이 어렵다고 하여 본처가 사망한 후 바로 후처를 들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습대로 첩을 한 사람 들였는데, 그 첩은 집안 살림을 잘 돌 보면서 퇴계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어린 두 아들도 친 어머니처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ref name="dtao28">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 28쪽</ref> 또 나중에 온전치 못한 둘째 부인 권씨를 맞이한 후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충실하게 챙겼다. 퇴계는 이러한 첩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두 자녀들에게도 친어머니와 동일하게 대하라고 하였다.<ref name="dtao28"/>
 
그 뒤 권질의 딸 권씨부인과 재혼하였다.<ref name="dtao28">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 28쪽</ref> 권씨 부인의 할아버지 권주(權柱(, 1457-1505)는 [[1503년]] 경상감사로 재직 중에 갑자사회(1504년) 때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평해 땅에 유배된 후 교살당하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官奴[[관노]]가 되었으며, 친정아버지 권질은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ref name="dtao28"/> 어린 나이에 그러한 士禍의사화의 참혹함을 경험한 권씨 부인은 정신적 후유증으로 이상 정세를 보였다. 아버지 權瓆은권질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해배(解配)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다시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인 무옥으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평소 퇴계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후 퇴계를 불러 집안의 참극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한 자신의 딸을 의탁하였다.<ref name="dtao28"/> 딸을 부탁할 때 자신의 딸이 어려서 겪은 집안의 모진 일을 당한 후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도 색시로 데려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리면서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하며 딸을 부탁하였다.<ref name="dtao28"/>
 
오랫동안 침묵하던 퇴계는 「예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승낙을 받고 예를 갖추어 혼례를 올리도록 하겠으니 마음 놓으시고 기력을 잘 보존하십시오.」라고 하였다.<ref name="dtao29">퇴계학부산연구원, 《퇴계학논총 제26집》 (퇴계학부산연구원, 2005) 29쪽</ref> 그는 심사숙고 후 예를 표하고 어머니의 윤허를 받고 혼례를 갖출 테니 심려 마시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권질이 예안으로 유배된 지 9년이 되는 해인 1530년에 권씨 부인을 맞이하였다.<ref name="dtao29"/>
[[1546년]](명종 원년) 47세 때, 권씨 부인과 혼인한지 16년이 되는 해였는데, 부인이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ref name="dtao30"/> 권씨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은 평소 친어머니처럼 깍듯이 예우할 것을 당부한 아버지 퇴계의 말대로 계모 권씨 무덤이 있던 산기슭에 노막(廬幕)을 지어 [[시묘살이]]를 하였고, 퇴계는 그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여를 기거하였다.<ref name="dtao30"/>
 
평소 퇴계는 자녀들에게 사람들이 親母와친모와 繼母를계모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니 그러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던 대로 자녀들은 권씨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ref name="dtao30"/> 퇴계 또한 아내의 제삿날이 되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손님 접대 후,자신은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 첩이 죽은 후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이적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이적의 후손들이 嫡庶적서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族譜에족보에 嫡庶의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ref name="dtao30"/>
 
퇴계는 모든 사람에게 정중한 예와 고매한 인격, 차별 없는 인애로서 대하였다.<ref name="dtao30"/>
[[1527년]](중종 22)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인 [[1528년]](중종 23)에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더불어 서로 교유하며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았다.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또한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은노수신은 [[조광조]]의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李延慶)의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33년]]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9년]](중종 34)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40년]](중종 35)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는 등 승진을 거듭하였다.
 
중종 말년인 [[1543년]](중종 38)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8월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먼저 고향으로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金麟厚)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10월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성묘를 핑계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이기 (1476년)|이기]](李芑)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 당하여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10월]] [[이기 (1476년)|이기]]가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되었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1546년]](명종 원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고, 그해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년]](명종 2)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나 권위, 편견을 두지 않았다. [[이언적]], [[이현보]] 등에게도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생각과 견해를 주고받는가 하면 [[기대승]]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을 하기도 했다. 이때 이황은 자신의 나이나 경력은 말하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적인 내용만으로 논쟁을 이어나갔다. 이황과 [[기대승]]의기대승의 토론과 편지논쟁은 후대의 사류들에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안동]]의 대장장이로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몰래 수업 내용을 듣던 대장장이 배순(裵純)이 자신의 수업을 듣는 것을 확인하였다. 배순은 대장장이이자 쇠,유기 등을 다루는 장인으로 제작한 그릇이 비뚤어지거나 흠이 있으면 시장에 내놓지 않았고, 그의 명성이 알려져서 배순의 집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누군가 만약 흠이 있는 그릇을 사려 하면 염가로 판매하기도 했다. 몰래 자신의 수업을 들은 것을 확인한 이황은 그에게 강(講)한강연한 내용들을 물어보았고, 배순은 하나도 틀림없이 대답하였다. 배순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한 이황은 신분을 뛰어넘어 배순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배순은 이황의 제자로 인정되어 정식으로 그에게서 학문을 배울수 있었고, 이에 감동한 배순은 더욱 열심히 학문을 수업하였다. 나중에 [[풍기]]로 이사한 뒤에도 이황을 찾았던 배순은 이황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3년상을 치루었으며, 금속으로 이황의 철상(鐵像)을 손수 만들어 제사를 지내 화제가 되었다 한다.
 
==== 주자대전 입수와 탐독 ====
그는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각처를 수소문한 끝에 [[1543년]](중종 38) 그는 드디어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그는 [[이언적]]이 쓴 저서들, [[조광조]]가 쓴 저서들을 모두 탐독, 독파하였는데 [[이언적]]의이언적의 저서가 많고, 사서육경과 주자에 대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 주해와 이언적 자신의 생각, 견해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칭송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조광조의 저서나 시문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 많이 당황해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의 책을 직접 읽어보기로 다짐하고 주자대전을 입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수소문하였다.
 
[[이언적]],이언적과 [[조광조]]의조광조의 저서 외에도 그는 이미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까지 이미 다 완독한 상태였다. 이황이 [[1543년]](중종 38)에 입수한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에 재간행한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으로, 가정간본의 원본은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정, 보충본이었다 한다.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였다.
 
==== 지방관 생활과 낙향 ====
[[1545년]](명종 즉위년)[[을사사화]]때 탄핵을 당하여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안동대도호부사, 홍문관 부응교, 의빈부 경력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희|주자]]', '이부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1548년]](명종 3)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기녀 두향을 만났다. 얼마 되지 않아 형 [[이해 (1496년)|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향약]]과 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치중하였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 서원 건립과 후학 양성 ====
풍기군수 재직 시절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의 [[소수서원]] 사액 실현은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년)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이어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인용문2|임금이 힘써야 할 일은 경술(經術)을 택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공(覇功)을 억제하는 것일 뿐인데, 조금만 잡되어도 패도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은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도모할 때여서 바야흐로 왕도가 행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佛敎)가불교가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비록 왕도에 마음을 다하더라도 마침내는 불교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기는 하나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도에는 미진한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 설(說)에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나라의 복을 연장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격치(格致)의 학문에 밝아 그 거짓됨을 환히 안다면 권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를 꺼내어 어상(御床)에 놓으며 아뢰기를,
{{인용문2|신이 [[1547년]](명종 2)에 소대(召對)하라는 명을 받고 입시하였을 적에 《논어(論語)》의 애공(哀公)이 사(社)에 대해 물은 장(章)의 전(傳)에 ‘재여(宰予)의 대답이 사(社)를 세운 본의(本意)가 아니다.’라는 데 이르러 상께서 하문하셨으나 신이 변변치 못하여 즉시 진달하지 못하였고, 그 뒤 외관(外官)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역시 아뢰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 소지에 쓴 것은 모두 사(社)를 세운 제도입니다. 제천(祭天)·교사(郊祀)는 우리 나라에서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예(禮)는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감히 써서 아룁니다.}}
 
그해 5월 [[사헌부]]집의,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월 사직하였다. [[1553년]] 행[[성균관]]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 (안동시)|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1553년]](명조 8) [[행상호군]]으로 빈전에서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서얼 허통을 지지하였는데 그는 일부 서자들이 적장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으나 서자라고 해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된다며 인재 채용시 귀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ref>명종실록 15권, 명종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10월 7일(경진) 1번째기사 "영의정 심연원 등이 서얼 방금법 등에 대해 의논한 법 개정을 결정하다"</ref>
 
[[1554년]](명조 9)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년]](명종 10) [[2월]] 다시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5월]]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56년]](명종 11) [[5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8년]](명종 13)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하였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9년]](명종 14) 다시 공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번 그에게 올라올 것을 권고하여 그해 [[7월]] 상경하여 정사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낙향하였다.
 
==== 학문 연구와 사상적 완성 ====
[[1560년]](명종 15)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문하생들이 찾아와 이를 지도하였다. [[1565년]](명종 20) [[4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반려하였다. [[1566년]]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반려하였다. 이후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조선 명종|명종]]이 갑자기 죽고 [[조선 선조|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 [[조선 선조|선조]]가선조가 여러번 부를 때마다 시정의 폐단을 간하는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가 거듭된 부탁으로 출사,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인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퇴계는 제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568년]](선조 원년) [[1월]] 행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하였고, 그해 [[7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동서 분당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성암 [[김효원]](金孝元), 그리고 한강 [[정구]] 등은 이황과 조식 둘에게서 배웠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유성룡]]과 [[김성일]]이며 많은 다른 제자들이 있었다. 한강 정구는·미수 [[허목]]에게 이어지며, 허목은·성호 [[이익]] 등 남인 실학자로 이어진다. 또한 여헌 [[장현광]] 등은 이황과 이이 학설의 절충을 한다. 이황은 영남학파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다. 이황 자신은 동서 분당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조선 숙종|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조선 영조|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조선 정조|정조]] 때 가서야 [[조선 정조|정조]]가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ref>이인좌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된 영남 선비들을 위문하는 뜻에서 도산서원, 소수서원에서 행하는 별시를 부활시킨다.</ref>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완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 사상과 신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