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77 바이트 제거됨 ,  27일 전
잔글 (봇: 전거 통제 틀 추가)
태그: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1527년]](중종 22) [[광주광역시|광주]] 광산구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기진(奇進)과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매우 슬퍼하며 어른처럼 애통해하였다. [[1537년]]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ref>[[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으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奇遵)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고 한다. </ref> [[1555년]](명종 10) 부친 물재공(勿齋公)이 사망하자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7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1558년]](명종 13) 7월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장성군|장성]](長城)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태인면|태인]](泰仁)의 일재(一齋) [[이항 (1499년)|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그해 10월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그 달에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얻어 보고, 경저(京邸)에 와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 [[이항 (1499년)|이항]]을 배알하고는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ref>“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이(理)일이일 뿐이어서 기(氣)와는기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ref> 이후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배알(拜謁)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金麟厚)는김인후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그의 주장이 옳다하고 하루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1559년]](명종 14) 1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발송 서(書)를 받아보고, 3월에는 퇴계(退溪)에게퇴계에게 저설(著說) 및 답서(答書)를 올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 8월에 [[퇴계]]에게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性情說)을 주장하였다. 10월에 [[퇴계]]의퇴계의 답서(答書) 및 변설(辨說)을 받아 보았다. 그해 겨울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매양 나아가 이기(理氣)를 강론했는데, 퇴계 [[이황]]의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도 깊이 의심하여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김인후가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 3월 세상을 버린 하서 [[김인후]](金麟厚) 영전에 글을 지어 전(奠)을 올렸다.<ref>제문(祭文) : 경신년 3월 7일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로써 근자에 작고하신 하서 선생 영정에 올리며 아뢰옵니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지경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은미(隱微)한 성언(聖言)을 장차 뉘가 들어 찾아내며, 후학들을 장차 뉘가 들어 깨닫게 하오리까. 너무도 하옵니다. 우리 도가 쇠퇴함이여! 세상에 어찌 다시 선생 같으신 분이 계시오리까. 제가 병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온 것은 선생에게 의지하여 의혹난 폐혹(蔽惑)을 제거하리라 바라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뉘 일렀겠사옵니까, 어찌하여 하늘도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아아! 선생께서 진택(眞宅: 유택)으로 돌아가시리니 이제는 종유(從遊)의 즐거움과 사모하고 우러르던 소회는 이로서 마지막이라,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공경히 한 잔을 올리오며 영결종천(永訣終天)하옵니다 아! 슬프옵니다.</ref> 5월에는 서신으로 추만 [[정지운]](鄭之雲)과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四七說) 및 「장서」(長書)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이황]]에게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退溪)와퇴계와 「사칠호발(四七互發)」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言)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 3월부터 [[퇴계]]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66년]]까지 8년간의 걸쳐 이루어진 [[사단칠정론|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의 서신이 유명한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를 통해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퇴계 [[이황]]을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562년]](명종 17) [[예문관|예문관(藝文館)]] 검열 겸 [[춘추관|춘추관(春秋館)]] 기사관을 임명되고, [[1563년]](명종 18)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해 3월 [[승정원|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와 사정(司正)에 임명되았다. 8월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 및 외척이었던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하에 삭직(削職)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 복재 기준 아들)의 상소로 12월 복직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충용(充用)되고, 이어서 장령, 의정부 사인,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전한(典翰)겸 예문관 응교(應敎)에 제수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다. [[1570년]](선조 3) 2월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대사헌(大司憲)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71년]](선조 4) 4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3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되어 주문(奏文)을 썼다. 9월에 대사간(大司諫)·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던 중 11월 초하루날에 46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별세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정철]](鄭澈)·[[고경명]](高敬命)·유근(柳根)·[[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 《왕복서(往復書)》 등이 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