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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 주요 이력 ==
[[1510년]](중종 5) [[전라도]] [[장성군|장성]]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다.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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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 [[조선 인종|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 (1499년)|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 (1499년)|이항]]의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 등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조희문(趙希文)]]·양자징(梁子徵)·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오건(吳健)·노적(盧適)·신각(申覺)·서태수(徐台壽)·이지남(李至男) 등이 있으며, [[기대승]](奇大升)·[[정철]](鄭澈)·[[김천일]](金千鎰)·[[박순 (조선)|박순]](朴淳) 등도 문인을 자처했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