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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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do P.jpg|섬네일|200px|17세기 에도의 정경]]
[[파일:Hiroshige le pont Nihonbashi à l'aube.jpg|섬네일|200px|니혼바시]]
'''에도'''({{llang|ja|江戸, えど}})는 [[일본]] [[도쿄]]의 옛 이름으로, [[에도 성에도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에도 막부]]가 일본을 지배하던 1603년부터[[1603년]]부터 1868년까지[[1868년]]까지 막부의 중심지였다. 이 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자 [[우키요]](浮世)의 개념으로 대표되는 활기찬 도시 문화의 장소가 되었다.
 
== 역사 ==
[[15세기]] 중엽 [[오타 도칸]](太田道灌)이 에도 성을 처음 축성한 이후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어 호조[[호조씨]], 다케다[[다케다씨]], 우에스기[[우에스기씨]] 3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위치한 일본의 정치 중심지이자 사실상의 수도였다. [[교토]](京都)는 단지 예전의 수도로써 남았다. 1457년에[[1457년]]에 사실상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어촌이었던 에도는 급격히 성장하여 [[1721년]] 무렵에 인구가 100만을 넘는 세계적으로도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가 되었다.
 
에도는 여러 번 화재에 시달렸다. 1657년에[[1657년]]에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메이레키 대화재]](明曆の大火)는 그 중 가장 피해가 큰 것이었다. 에도 시대에 대략 100번의 화재가 있었고 일반적으로 부주의에 의해 시작되어 숯을 사용하는 목조 주택들 사이로 빠르게 확대되었다. 1600년부터[[1600년]]부터 1945년까지[[1945년]]까지 에도/도쿄에는 25 ~ 50년을 주기로 [[화재]],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전쟁]] 등이 발생했다.
 
1868년에 막부가 전복되면서 도시는 "동쪽의 수도"를 의미하는 '''도쿄(東京)'''로 개칭되었고 황제는 거처를 도쿄로 이동해 도시는 일본의 공식적인 수도가 되었다.
 
* [[1868년]] [[9월 3일]] : 에도는 "동쪽의 수도"를 의미하는 ''도쿄''로 개칭되었다.
* [[1868년]] [[10월 12일]] : [[메이지 천황]]이 교토에서 황위에 올랐다.
* [[1868년]] [[10월 23일]] : 연호를 게이오에서[[게이오]]에서 메이지로[[메이지]]로 바꾸었다.
* [[1868년]] [[12월 10일]] : 천황이[[천황]]이 도쿄로 왔고 에도 성은에도성은 [[こうきょ|고쿄]](皇居)가 되었다.
 
== 행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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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
에도는 에도 성에도성 주변에 놓여있는 성촌이었다. 성을 직접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야마노테]](山手)로 불렀고 주로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 하에 에도에 일정 기간 머무르는 [[다이묘]](大名) 및 그들의 식솔들을 위한 저택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이로 인해 에도는 다른 주요 도시인 [[교토]]나 [[오사카]](大阪)와 달리 [[사무라이]]의 인구가 두드러지게 많았다. 교토는 황실과 [[구게]](公家)에 의해 지배되는 수많은 불교 사찰 및 전통적인 유산과 정체성이 특징인 도시였고 오사카는 일본의 상업 중심지로써 [[조닌]](町人)으로 불리는 상인 계층에 의해 지배되는 도시였다.
 
중심부로부터 더 먼 지역은 평민과 조닌(상인)들의 거주지였다. 이 지역은 성 북동쪽의 [[시타마치]](下町)로 알려졌고 도시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고대 불교 사찰인 [[센소지]](淺草寺)가 전통적인 도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사쿠사]](淺草)에 여전히 서있다. 절로 들어가기 전에 거리에 있는 상점들은 에도 시대 이래로 계속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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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동쪽 가장자리를 흐르는 [[스미다 강]](隅田川)을 따라 막부의 미곡 창고와 공공 건물, 유명한 식당들이 서있었다.
 
[[니혼바시|에도바시]](江戶橋)는 도시의 상업 중심지로써 구라마에(蔵前 -; 창고의 앞)로도 불렸다. 많은 어부, 장인 및 기타 생산자와 소매 상인들이 이곳에서 [[오사카]] 및 여러 도시들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을 관리하는 운송업자로써 활동하였다. 이 지역은 오늘날 도쿄의 금융과 업무의 중심지로 남아있다.
 
도시의 북동쪽은 전통적인 [[음양사]]에서 위험한 방향으로 여겨졌고 도시를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센소지, 간에이지 등의 절이 세워졌다. 북동쪽 너머로는 [[부라쿠민]](部落民)과 하층민 지구가 있었고 이들은 불결한 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평민 주거지로부터 분리되었다. 부라쿠민 지구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강둑을 따라 흙길이 서쪽으로 뻗어있었고 도시의 북쪽 가장자리인 [[요시와라]](吉原) 유흥가에 이르렀다. 예전에 이들은 아사쿠사와 가까운 도시 내에 위치했지만 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도시로부터 더 먼 곳에 재건되었다.
 
{{넓은 그림|Edo Panorama old Tokyo color photochrom.jpg|800px|산킨코타이 제도 하에 에도에 일정 기간 머물렀던 다이묘 및 그들의 식솔들을 위한 저택의 밀집지역 풍경. 1865년/1866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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