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58 바이트 제거됨 ,  1년 전
잔글
파일 추가, 링크 수정
잔글 (파일 추가, 링크 수정)
 
== 배경 ==
[[파일:朝鮮物産奬勵會 1931.png|섬네일|왼쪽|[[익선동]]에 있던 조선물산장려회 서울회관 (1931년)]]
[[1919년]] [[3.1 운동]]으로 일제는 [[무단 통치|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문화통치]]로 바꾸어 가게 된다. 또한, [[1910년]] [[조선총독부|총독부]]는 민족자본 회사를 억제하고자 회사 설립에 제한을 두었던 [[회사령]]을 1920년에 철폐하였다. 총독부가 회사령을 폐지한 본질적인 이유는 일본 기업의 자본이 좀 더 한반도에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내린 조치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에 따라 1920년대 일제의 기업들이 식민지 조선에 지부를 설치하고 뿌리를 내리게 되고, 조선의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회사령 철폐로 인해 일본기업들이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킨 반면, 1920년대에 조선의 민족자본 회사 역시 점차 증가되면서 민족 기업을 지원하고, 민족 경제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하게 된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기독교|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이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에 대해 논의하였고, 그 결과 조선물산장려회가 발족한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기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A1%B0%EC%84%A0%EB%AC%BC%EC%82%B0%EC%9E%A5%EB%A0%A4%EC%9A%B4%EB%8F%99&ridx=0&tot=8708 조선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E0052020}}</ref>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당면 실천과제로 경제계의 진흥, 사회의 발전, [[실업자]]의 구제책, 국산품 애용, 근검 풍토, 실천성의 양성을 내세웠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자, [[경성부|경성]]의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해 [[1922년]] 말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계와 비판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8-06-25}}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운동 자체에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토산품만 사용하다 보니 토산품 가격이 크게 폭등하였고, 이는 곧 상인과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만 낳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과 일부 민중들이 '물산 장려 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여기에 일본 제국 총독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영효]], [[유성준 (1860년)|유성준]] 같은 친일 세력들의 관여로 일제와 타협하게 되는 등 변질이 되어 감에 따라 결국 쇠퇴했음쇠퇴하였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