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기 (5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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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劉弘基 [[582년]] ~ [[650년]])는 중국 당(唐)나라의 군인이다. 본관은 옹주(雍州) 지양(池陽)현 사람이다. 능연각 24공신(凌煙閣二十四功臣)의 한사람이기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 생애 ==
수(隨)의 하주(河州-지금의 [[간쑤성]](甘肅省) [[린샤 시]](臨夏))자사 유승(劉昇)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홍기는 어려서부터 소행이 나쁘고, 협객과 교우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부친의 음관으로 우훈시(右勲侍)에 임명되었다. 수 대업(大業) 말년, [[고구려-수 전쟁|고구려 원정]](高句麗 遠征)을 피하고, 부대의 군사와 소를 죽이고 관리를 비판하다가 포박되었다. 1년 여 후에 석방이 된 후, 태원(太原)에 와서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을 섬겼다. 이후 [[이세민]](李世民)에게 발탁되어 신뢰를 받았다. 서기 [[617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을 하자 유홍기는 병사를 모집해 2천명을2천 명을 모았다. 왕위(王威), 고군아(高君雅) 등이 이연의 행동을 의심하자, 홍기와유홍기와 [[장손순덕]](長孫順德)은 이연을 재촉해 왕위와 고군아 등을 사로잡았다. 거병 후 서하(西河)를 공격해 송노생(宋老生)을 격파한 공으로 우광록대부(右光綠大夫)에 임명되었다. 당군이 포주(蒲州)에 도착해 맨 앞장을 서서 황하를 건너 풍익(馮翊)을 떨어뜨렸다.
 
그 후, 위북도대사(渭北道大使)가 되어 [[은개산]](殷開山)을 보좌했다. 이어 부풍군(扶風郡)을 둘러싸고 위수를 건너 장안고성에 이르렀다. 수나라 장수 위문승(衛文昇)의 공격에 대응해 승리했으며 이때 수나라의 다른 장수인 [[굴돌통]](屈突通)도 사로잡았다. 장안이 평정되고 당나라가 건국되자 제일가는 공적을 인정받아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당나라군이 [[설거]](薛擧-수나라 중국 군웅의 한사람)를 공격해 천수원(淺水原)에서 싸울때싸울 여덟명의때 여덟 명의 총관이 이끌던 군대는 모두 궤멸되었지만 유홍기의 군대는 잔존해 있었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져 설거에게 잡혔다. [[618년]], 설거가 죽고 그의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당나라에 평정되면서 유홍기는 귀국해 원래의 관에 복귀했다. [[619년]], [[유무주]](劉武周)가 태원을 공격했을 때, 유홍기는 평양에 주둔하며 저항했으나 사로잡혔다. 그 후 자력으로 탈출해서 귀환하였다. 좌일총관(左一總管)에 임명되었다. [[620년]], 진왕(秦王) 이세민을 따라 백벽(柏壁)에 주둔했다. 정예 2천명을2천 명을 이끌고 습주(隰州)에서 서하를 향해 유무주의 귀로를 막고 용전했다. 이어 송금강(宋金剛)을 격파하고 임국공(任國公)에 봉해졌다. [[622년]] [[유흑달]](劉黑闥)에 대한 정벌에 종군한 공으로 정월장군(井鉞將軍)에 임명되었다. 돌궐에 대한 방비를 위해 유주(幽州)의 북동쪽인 자오령(子午嶺)에서 서쪽 임경(臨涇)에 이르는 경계선을 지켰다.
 
[[626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자 진왕 이세민의 휘하에서 세민을 황제로 옹립하는데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인 [[627년]], 이효상(李孝常)과의 교우가 있었기 때문에 모반죄에 연좌되어 서민으로 떨어졌다. 1여 년후 복귀해 역주자사(易州刺史)가 되어 작위를 회복하고 소환되어 위위경(衛尉卿)에 임명되었다. [[635년]], 기국공(夔國公)에 개봉되었으며 노년에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 후, 당태종이 [[고구려-당 전쟁|고구려 원정]]군을 일으키자 전군대총관(前軍大總管)에 임명되어 주필산(駐蹕山)에서 싸웠다. [[650년]], 1100호(戸)에 가봉(加封)되었고, 곧 세상을 떠났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당시대에 글을 쓰게 하는 산관(散官), 정일품(正一品)}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추증되고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시호는 양(襄)이다.
아들 유인실(劉仁実)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