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 쇼나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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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불교]]
|배우자=
|자녀= 고마노 묘부
|부모= 아버지 기요하라노 모토스케
|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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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조 천황]](一条天皇)의 치세인 [[쇼랴쿠]](正暦) 4년([[993년]]) 겨울 무렵부터,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로 입궁하여 중궁(中宮)이 된 [[후지와라노 데이시|데이시]](定子)의 개인 뇨보의 자격으로 출사하여 그녀를 보필했다. 학문에 뛰어나고 재기발랄했던 그녀는 주군 데이시의 총애를 받게 되기 전에도 이미 조정의 여러 구교나 덴조비토(殿上人)들과의 증답이나 기지를 건 응수를 자주 주고 받으며 당시의 궁정 사회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녀와 친교를 주고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후지와라노 사네카타(藤原実方, ? - [[998년]]), 후지와라노 다다노부(藤原斉信, [[967년]] - [[1035년]]), 후지와라노 유키나리(藤原行成, [[972년]] - [[1027년]]), 미나모토노 노부카타(源宣方, ? - 998년), 미나모토노 쓰네후사(源経房, [[969년]] - [[1023년]]) 등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특히 사네카타와의 증답이 많이 알려져 있어 연애 관계가 아니었나 추정하기도 한다).
 
세이 쇼나곤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널리 알리게 된 데에는 그녀가 남긴 수필 《마쿠라노소시》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쿠라노소시》에는 '모노하즈쿠시(ものはづくし)' 즉 시의 소재가 된 명소 등의 유취를 비롯해, 시에서 뛰어난 문구, 일상의 관찰, 개인 및 주변 사람들의 소문, 기록으로서의 성질을 가진 그녀 자신의 회상 등, 세이 쇼나곤이 10세기 헤이안 시대의 궁정에서 보낸 동안에 흥미를 가지고 기록했던 모든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마쿠라노소시》는 [[조호 (999년)|조호]](長保) 2년([[1000년]])에 중궁 데이시가 사망한 이듬해에 그 초고가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데이시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이 쇼나곤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의 그녀의 인생은 자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세이 쇼나곤 자신의 개인 문집과 같은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재혼한 남편인 후지오라노 무네요와 함께 남편의 부임지 셋쓰로 낙향했다고낙향해 생각된다딸 고마노 묘부를 낳은 듯 하다(《세이 쇼나곤 집》의 이본에는 다이리의 사자로서 구란도蔵人 노부카타信隆가 셋쓰로 왔었다는 기술이 있다). 만년에는 비구니로서 출가하였으며<ref name="makura"/> 죽은 아버지 모토스케의 산장(山莊)이 있던 히가시야마 게쓰륜(東山月輪) 근처에서 살며 후지와라노 기미토(藤原公任) 등 당시 궁정의 옛 관인이나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 [[아카조메에몬]](赤染衛門) 등 중궁 [[후지와라노 쇼시|쇼시]](彰子)를 섬기던 뇨보들과도 소식을 주고받았음을 해당 인물들의 문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망년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현재 일본 각지에는 세이 쇼나곤의 묘라고 전하는 무덤이 남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