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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측면에서 신라의 경계 대상은 발해 그리고 일본이었다. 발해의 팽창에 맞서 신라는 20년([[721년]]) 가을 7월에 [[명주 (9주)|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정부(丁夫) 2천 명을 뽑아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33년([[734년]])에 이르러 당은 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과 함께 정절(旌節)을 주어 발해의 견제를 맡겼다. 김지렴과 교대하게 된 김충신은 이때 현종에게 표를 올려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내려줄 것을 현종에게 요청하고 있다. 여름 4월에 신라에서는 대신인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고, 현종은 그를 내전에 불러 잔치를 열어준 뒤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을 내리고, 비색 난포(襴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하사했다. 지렴은 이때에 이르러 홍려소경원외치(鴻臚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제수받았다. 이듬해([[735년]]) 다시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하정사로 보냈는데,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어 당으로부터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받았다. 돌아오는 의충에 부쳐 당은 패강(浿江)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완전히 승인했다. 이는 신라와 당 사이에서 세력을 키운 발해에 대한 대항이라는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왕은 이듬해([[736년]]) 여름 6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감사의 뜻을 보냈다.
 
한편, 일본과는 2년(703년) 204명에 달하는 일본국 사신을 받아들일 정도<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二年...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2년(703)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 }}</ref> 로 초기에는 우호관계였지만 후반에 이르러 갑자기 대립 무드가구조가 조성되었다. 《[[해동제국기|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1년([[722년]]) [[음력 10월|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적들의 길을 막았다. 성의 둘레는 6,792보(步) 다섯 자에 동원된 역도(役徒)는 39,262인이었으며, 책임자는 원진(元眞) 각간이 맡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연도= 1281 |장= [[:zh:s: 三國遺事/卷第二#孝成王|권2 기이 효성왕]] |인용문= 開元十年壬戌十月。始築關門於毛火郡。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乃防日本塞垣也。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掌員元真角干。開元二十一年癸酉。唐人欲征北犾。請兵新羅。客使六百四人來还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 (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 (毛火村)으로 경주 (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 (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 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 (元眞) 각간(角干) 이었다. ) }}</ref><ref group="주">개원(開元)은 당 현종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웹 인용 |url=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y_002r_0010_0060_0010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제목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유사 |인용문 = 譯註 002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二十一年 …冬十月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21년(722) …겨울 10월에 …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ref> 이는 경주의 동남쪽 경계였다. 30년([[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고,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三十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觀射車弩 (30년(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ref> 패강 이남 지역의 영유권을 승인받은 뒤인 35년([[736년]])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시켜 [[한산주|평양(平壤)]]·[[삭주|우두(牛頭)]] 두 주(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재위 36년([[737년]]) [[음력 2월|2월]]에 승하하였다. 성덕왕으로 시호가 추봉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묻혔다. 당으로부터 태자태보(太子太保)의 관직이 추증되었다. 신라 중대, 그리고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