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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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新東京国際空港当初案(富里空港案)・三里塚空港案.jpg|섬네일|230px|도미사토 공항안과 산리즈카 공항안 크기를를1966년 당시 하네다 공항과 비교한 지도.]]
[[파일:新東京国際空港の位置および関連公共施設計画図(案).jpg|섬네일|230px|1966년 7월 4일 각의 자료. 공유지나 골프장을 최대한 이용하여 토지 수용 대상 사유지 면적을 최대한 줄이러는 의도가 있었다. ([[일본 국립 공문서관]] 소장)]]
 
나카무라 운수상이 "도미사토·야치마타 외에는 없다" 라고 말한 다음 날인 6월 22일 사토 총리가 산리즈카·시바야마 지구에 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도모노 지사와 협의하였고 그 내용이 보도되었다.{{refnest|group=주해|6월 23일 [[아사히 신문]] 조간에서는 "(정부는) 도모노 지사에게 강행할 경우 유혈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현지(도미사토)의 정세를 듣고선 국유지를 활용해 이전 대상 농가를 최소화하고, 이를 통해 분규를 최소화하는 길을 선택했다"라며 산리즈카 안의 이해를 나타내는 기사를 싣었스며,<ref>[[#前田伸夫|前田伸夫(2005)]]46頁。</ref><ref>朝日新聞1966年6月23日(12版)1面</ref> 지역 신문인 [[지바 신문]]도 6월 27일자 사설에서 "정부로서는 예상 면적이 급감하였으며 이 때문에 SST용을 당장 늘려 하네다 공항의 과밀해소에 대응하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는데, 극심한 난국을 잘 해쳐나갈 수 있었다"라고 일정 부분 평가하였다.<ref>{{Cite journal|date=1966-06-27|title=円満解決に総力を 三里塚空港設置やむなし|journal=千葉日報|page=1}}</ref>}} 3일 후인 6월 25일 도모노 지사는 나리타 시장인 [[후지쿠라 다케오]]에게 위의 협의 사항을 정식으로 전달하였다.<ref name="広報なりた">{{Cite journal|date=2004-12|title=<シリーズ成田市50年> 第四回 新空港決定 新空港に「三里塚」を閣議決定 新しい成田の歴史と厳しい空港問題の幕開け|url=https://www.city.narita.chiba.jp/content/000021199.pdf|format=pdf|magazine=広報なりた|issue=平成15年12月1日号|pages=12-13|publisher=成田市役所企画政策部広報課|accessdate=2019-02-14}}</ref>
 
이번에는 지바현 수장과는 조정이 이루어졌지만 현지 주민의 의견청취는 전혀 이뤄지지 않아 현지와는 한 마디 상담도 없이 공항이 떠밀려지는 판국이었다. 이 때문에 도미사토에서는 공항 건설을 강 건너 불구경으로 바라보고, 공항 건설로 경제적 혜택을 기대하였던 산리즈카·시바야마 지구 주민들도 갑작스럽게 공항 건설 내정지가 되었음을 보도로 알게 되자 "일반보(10아르, 대략 1,000 m²)나 되는 것(항공기)가 내려온다. 그런 것이 내려오면 어떻게 하나.", "전쟁이 일어나면 포탄이 먼저 떨어진다", "소음으로 소젖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등 공황 상태에 빠져 도미사토처럼 거세게 반발하였다.{{refnest|group=주해|예외적으로 일본 항공계의 개척자로도 불리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도호 마을에 정착했던 [[이토 오토지로]]는 공항 건설지가 된 것에 환영했다.<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40ページ</ref>}}<ref name=":22" /><ref>[[#伊藤睦|伊藤睦(2017)]]143頁。</ref>
 
== 개항 이전 분쟁의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