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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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끝난 후 호광총병(湖廣總兵)에 임명되었고, 만력27년(1599) 명 조정은 진린의 공적을 인정하였다. 이후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파주(播州)(오늘날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일대) 묘족(苗族)의 난을 진압하였다.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다.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 시난징시|남경]](南京)으로부터 배를 타고 [[조선]]로 와서 [[남해군]]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康津)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海南縣)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 관련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