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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장정 개략도
|날짜=1934년 10월 - 1935년 10월
|장소=[[중국]], [[장시 성]]에서 [[산시 성산시성 (섬서성)|산시성]]까지
|결과=[[중국공산당]]과 [[홍군]]주력이 [[중국국민당|국민당]]군을 피해 도주에 성공함,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새로운 수도가 [[즈단 현]]으로 정해짐
|교전국1={{국기|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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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1934년 10월 16일에 [[중국]] 남부 [[장시 성]] [[중화소비에트공화국|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 해방구)]]의 8만 명의 중국 [[홍군]](중국 공산당 군) [[제1 방면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에 [[산시 성산시성 (섬서성)]]에 도착했다.
 
탈출은, [[장제스]]가 1년 전부터 70만여 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 물샐틈 없는 포위망을 치면서부터 예고됐다. [[중국국민당]]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 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지배영역과 병력이 감소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중국 남부의 [[장시 성]]과 [[푸젠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제1방면군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홍군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많았는데, 저우언라이와 함께 지도력을 양분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소련의 압력으로 지도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모험주의 노선의 지도부가 상대적으로 매우 강했던 국민당군은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으로 대응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장기적인 목적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일단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압력이 약한 곳을 노려 탈출하였고 강력한 국민당군을 피하는 게 일차적 목표였다. 최종목적지로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산시 성산시성 (섬서성)|산시 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의 투쟁과 홍군 내부의 이견을 극복한 결과였다.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유리하다는 것도 최종 목적지가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시대|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 입은 2만 명을 포함한 2만 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처음 탈출시엔 중화기와 문서, 인쇄기구 등 많은 짐들이 있어 기동성이 약했기에 그 피해가 더 커졌다. 급한 탈출을 위해 그런 짐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홍군의 중요 역사적 기록문서들이 상실된 것은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홍군은 패전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강한 상대와 싸우는 데에는 게릴라전이 효과적인 전략임을 실감, 1935년 1월 마오쩌둥의 노선이 다시 채택되고 그에게 당지도권을 주었다. 그 뒤 홍군의 군사행동은 한층 기동성을 띄어 당시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한 [[사천성]] 북부의 제 4방면군과의 합류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의 추격은 집요했다. 오지 끝까지 제 1방면군을 향한 추격은 이어졌고 제4방면군과의 합류도 저지하려 노력하였다. 그럴수록 홍군의 도피행렬은 오지와 첩첩산중으로 이어졌고 [[공군]]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의 탄압, 더위, 식량부족으로 도중에 많은 군인들이 죽었다. 그리고 농민들을 신병으로 충원하곤 했다. 대운하의 도하, 대설산을 넘는 강행군, 사천성에서 감숙성으로 향하는 대평원에서의 흙탕물과 기아로 극한의 위기를 자주 맞이했지만 기동력과 군사들의 헌신, 그리고 장개석 외의 기타 군벌 및 소수민족과의 타협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다. 1935년 10월, 368일의 행군 끝에 제 4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제 1방면군의 원호작전을 맡고 있던 제 2방면군도 11개 성, 18개의 산맥을 넘어 1935년 10월 [[감숙성]]에서 제 1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