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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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추밀부사(樞密副使)ㆍ참지정사(參知政事)〔부재상(副宰相)〕에 오르고 [[소순]]ㆍ[[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을 대상으로 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
 
은퇴 다음해인 1072년([[희녕]] 5년), 은둔 생활하면서 영주([[안후이 성안후이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수는 66세로 천명을 다했고 2년 후에 조정에서 [[시호]] '문충(文忠)'을 내렸다. 문충은 그가 일생 달성한 문학과 관련된 위업의 저력을 알 수 있는 상징이다.
 
== 후대 문화에 끼친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