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녀산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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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오녀산성의 옛 이름인 우라산성의 발음이 위나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의 국내성은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노태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7월조에 기록된 을두지의 발언에서 묘사되는 위나암성의 지형이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오녀산성이 졸본성이 아닌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집안 지역 천도를 [[산상왕]] 재위기로 보며, 졸본성을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나합성(喇哈城)으로 비정하였다.<ref>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