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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역사}}
[[이란]]의 역사는 기원전 6,50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이란의 역사를 말한다.
{{대 이란의 역사}}
 
==이란인의 형성과 메디아 시대==
{{본문|엘람|메디아}}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아리아인]]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페르시아인]]들) 등이 모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
{{본문|아케메네스조아케메네스 페르시아제국}}
 
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하였고, 아케메네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가 연 왕조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 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헬레니즘 왕조의 통치==
{{본문|셀레우코스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 1세]]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년 - 기원전 247년)라고 부른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본문|파르티아|사산조사산 페르시아제국}}
 
[[파르티아|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2세]](Mithradates II, [[기원전 123년]]-[[기원전 87년]])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 공화정]]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본문|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우마이야 왕조}}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던 사막의 유목 민족이었다. 아랍족이 페르시아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참조본문|셀주크 투르크제국|일 한국|티무르 제국}}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다.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즉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헤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아사신|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즉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한다.
 
==팔레비 왕조와 레자 샤의 개혁==
{{본문|팔레비팔라비 왕조}}
 
왕실은 부패하였고, 국가의 권리를 서구에 양도하였다. 이에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되었다.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했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왕은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Mohammad Ali Shah)는 입을 씻고 헌법을 파기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
{{본문|이란 혁명}}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 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19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 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 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 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 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 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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