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편집 요약 없음 |
||
2번째 줄:
{{다른 뜻|사육신 (드라마)||드라마}}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단종|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河緯地)· [[이개]](李塏) · [[
를 일컫는 말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ref>생육신과 기타 은자들의 경우는 또다시 청담파로 재분류하기도 한다.</ref>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16번째 줄:
[[세종대왕]]이 죽으면서 자신의 [[조선 문종|장남 향]](문종)도 오래 못살 것이라 판단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할 것을 유언하였다. [[조선 단종|단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이들은 세조 암살을 통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해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 당시 시체는 처형장인 새남터에 그대로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하나인 매월당 [[김시습]]에 의해 몰래 매장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노량진]]에 사육신을 기념하는 묘지가 있다.
사육신은 [[성삼문]](成三問)· [[
사육신의 시신은 [[성삼문]]의 사위인 [[박임경]]이 수습하여 [[한강]]변 [[노량진]]에 매장하였다.
36번째 줄:
사육신의 시신이 매장된 뒤 [[조선 세조|세조]]는 이를 보고 당대에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한편 사육신의 편에서 [[조선 세조|세조]]의 편으로 전향한 [[신숙주]], [[김질 (1422년)|김질]], [[정인지]]는 배신자의 상징처럼 여겨져 비판과 지탄,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은 사후 [[조선 중종|중종]] 때 가서야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조선 현종|현종]] 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조선 영조|영조]], [[조선 정조|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1782년]](정조 6) [[조선 정조|정조]]는 [[성삼문]]
=== 시신의 매장 ===
43번째 줄:
사육신의 시신은 누가 매장하였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통설에 의하면 매월당 [[김시습]]이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한강]]변에 매장했다고 한다.
비밀리에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어느날 야밤에 [[성삼문]]
이때 [[박팽년]]의 형제들과 부친을 근처에 묻고 박씨지묘라는 비석을 따로 더 세웠고, [[성삼문]]의 형제들의 시신을 성삼문 묘 근처에 묻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묘의 앞쪽 혹은 뒷쪽에 묻고 성씨 지묘 라고 쓴 비석을 두 기를 더 세웠다.
61번째 줄:
** [[유성원]](柳誠源)
** [[박팽년]](朴彭年)
** [[
* [[생육신]](生六臣) :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