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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통 논란 ==
===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한 고려왕 ===
우왕의 폐위는 그가 공민왕의 아들, 즉 고려 왕실의 왕씨가 아니라 역적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의 치세를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편목인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烈傳)에 넣었고, 성과 이름 또한 신우(辛禑)라 적고 있다. 우왕 및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인가 신돈의 혈통인가에 대한 진위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신돈의 혈통이라 기정사실화되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우 · 창왕을 폐위를 정당화하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9760&cid=1591&categoryId=15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왕 항목]</ref>
 
=== 정몽주도 우왕, 창왕 신씨설에 동조 ===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을 폐위하는 데는 가담하였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ref name="naeill0126">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ref> 우왕 부자가 왕위에 오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 태조|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ref name="naeill0126"/> [[정몽주]] 역시 [[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 왕의 즉위가 반역이라는 고려사 서술에 관한 반론 ===
조선 후기 국학의 발달로 고려 말년의 기사에 대한 사료 비판과 함께, 우왕과 창왕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루어졌다. 우왕 부자가 《고려사》의 반역열전에 실린 것에 대해 성호 이익은 《강목》(綱目)에서 [[진시황]](秦始皇)이나 진(晉) 원제(元帝)의 사례를 들며 두 황제 모두 사가들에 의해 전왕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단정되었지만 위호(位號)는 떼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우왕이 공민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고 공민왕으로부터 아들로 인정받아 아비로써 물려주고 자식으로써 이어받은 것인데 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우왕과 창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에 대해서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창왕이 즉위한 뒤 경연에서 [[윤소종]]이 창왕에게 "상왕(上王)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총명(聰明)이 학문으로 향하셨으나" 운운하는 부분을 들며, 폐위되고도 창왕이 즉위했던 당대에는 상왕이라는 칭호로 존숭받은 점은 우왕이 신씨라는 설에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왕씨임이 틀림없다고 《[[동사강목]]》에서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