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키 모리타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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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원년([[1573년]]) [[구키 요시타카 (센고쿠 시대)|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게이초]] 2년([[1597년]]) 아버지 요시타카로부터 가독을 잇는다. 게이초 5년([[1600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종군하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에 의한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급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도바 성]]에서 서군 편에 가세하고 있었다. 전후 모리타카은모리타카는 이에야스에게 아버지를 구명하려 탄원하고 그에 따라 인정되었다고 요시타카에 사자를 파견했는데, 이전에 구키 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도요타 고로에몬]](豊田五郎右衛門)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 할복하도록 조언하며 이에 요시타카는 자해(할복)하였다. 이에 모리타카는 격노하여 고로에몬을 [[노코기리비키|톱켜기]](鋸挽き)로 참수 후에 효수하였다.
 
도바 번 초대 번주로서 5만 6000석을 소유하게된다. [[구키 수군]](九鬼水軍)을 이끌고 [[오사카 전투]]를 치르고 [[에도 성]]의 축성 때는 목재와 석재를 해상 수송하고 [[에도 막부]]에 협력한다. 그 뒤 도바 번의 상속자 [[구키 요시타카 (에도 시대)|요시타카]](良隆)를 폐적시키고 불문에 귀의한 모리타카의 다섯째 아들 [[구키 히사타카|히사타카]](久隆)을 환속시키고 후계자로 정하였다. 이에 모리타카의 셋째 아들 [[구키 다카스에|다카스에]](隆季)는 이에 반대하였고 [[간에이]] 9년([[1632년]])에 모리타카가 사망하자 가독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을 감지한 막부는 히사타카가 모리타카의 뒤를 이으라 명했고 그 후 구키 가문은 [[셋쓰 국|셋쓰]] [[산다 번]]에 이봉되었다.
 
== 각주 ==
{{전임후임
|후임자 = [[구키 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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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597년]] ~ [[1632년]]
}}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