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 스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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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 왕원록과 장경동 ==
[[1904년]]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고 있던 태청궁의 도사 [[왕원록]]이 막고굴 제16굴에서 숨겨진 작은 방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제17로 알려진 장경동이며, 이곳에서 약 5만점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서구 열강들의열강의 침략과각축과 내부 부패에분란, 의해부패 국력이등으로 허약해질대로국력이 허약해진피폐해진 [[청나라]] 정부와 지방 관리들은 왕원록의 탐사 활동에 대해 무관심했다. 도사 왕원록은 고문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 유물 보존을 위해 엄청난 발품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어떤 관리도 인적인,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 오렐 스타인 ==
장경동의 보물에 대한 소문을 들은 오렐 스타인은 [[1907년]] 실의에 빠진 도사 왕원록에게 재정 보조금을 지급하고, 약 7,000점의 유물을 영국으로 보냈다. 이것이 바로 유럽에 '둔황'의 '막고굴'의 존재를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으며, 둔황의 유물과 배경에 대해 활발한 연구가 시작된 계기이다.
 
무엇보다도 스타인이 세운 공적은 [[8세기]]의 고구려계 [[당나라]] 명장 [[고선지]]의 업적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 폴 펠리오와 오타니 고즈이 ==
[[그림:Pelliot.jpg|thumb|250px|장경동의 문서를 조사하는 폴 펠리오]]
1년 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도 비슷한 금액을 지불하고, 오렐 스타인이 가져갔던 분량만큼의 유물을 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이후 일본인 젊은 승려인 [[오타니 고즈이]](1876-1948, 大谷光瑞)도 5,000점의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미국인 [[랭던 위너]] 등도 막고굴의 유물을 모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1908년]] 폴 펠리오가 가져 갔던 유물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필사본이 있었다. 오타니가 일본으로 유출한 유물 중에는 일부가 완전히 유출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어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307호)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에 이런 대량의 유물 유출을 두고, 현재의 중국은 유물도둑이라고 분개한다. 하지만 당시 왕원록이 유물 보존을 위해 400킬로미터를 여행하며 지역의 관리들에게관리들과 호소를교섭, 담판을 하며 다녔던 노고와노력과, [[문화혁명]] 당시 둔황의 많은상당수 유물들이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던파손되었던 광란의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중국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은 유물을 반환하라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 참고 사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