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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아들 [[서필]](徐弼)이 고려의 [[내의령]](內議令), 손자 [[서희]](徐熙)가 내사령(內史令), 증손자 [[서눌]](徐訥)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3대가 배향공신이 되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94r_0010_0010_0090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ref>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 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고려의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1]
 
서희의 아들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서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徐鈞)이 우복야(右僕射), 현손인 서공(徐恭)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서순(徐淳)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 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