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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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5월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배후가 임시정부의 김구 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구의 세계적 명성은 치솟았고 임정에 흘러오는 자금에도 활기를 띄어 재정난이 해소되었다.
 
===== "김구일파"한인애국단의 옥관빈 피살 사건 =====
<blockquote>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삼덕양행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권 한인애국단 Ⅰ, 2008년 11월)<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2020-10-24}}</ref></blockquote>
[[파일:옥관빈.JPG|링크=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EC%98%A5%EA%B4%80%EB%B9%88.JPG|왼쪽|섬네일|197x197픽셀|옥관빈]]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03_w0002_0390|제목=上海 法界에서 玉觀彬被殺, 친척의 집을 방문하려든 중 數名靑年이 突然狙擊[肖]|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33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15_x0002_0820|제목=玉觀彬暗殺은 思想團所爲? 「○○除奸團 罪狀宣布로」 中國側에 一大衝動(上海)//玉觀彬氏屍體 平壤에 安着|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ref name=":37">{{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제목=孫世一의 비교 評傳 (5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월간조선|확인날짜=}}</ref><ref name=":402">{{서적 인용|제목=玉觀彬의 상해 망명과 활동|성=김광재|이름=|날짜=2011년 12월 00일|판=한국근현대사연구 제59집|출판사=한국근현대사학회|쪽=46|장=}}</ref>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ma_016_0370_0170|제목=玉觀彬氏의 豪語|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김구 일파의 애국단 대 이곳 한국독립당의 알력은 최근 마치 평안도파 대 황해도파의 대립과 같은 색채를 띠어 왔고 점점 더 격화하는 형세임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음. 원래 이 항쟁의 연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립당 측이 ‘이른바 애국단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당의 일부분적 단체인 성질을 띠는 것으로, 애국단이라는 명의로써 헛되이 허장성세할 것이 아니라 一國一黨의 대세에 준거하여 독립당이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데 대하여 김구 일파의 애국단 일파에서는 ‘우리 애국단은 東京 및 신공원의 폭탄사건, 大連 사건 등 위대한 공적을 거두었는데 이 모두 우리의 자발적 행동이며 그 위대한 행동은 결코 멸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범위의 확충과 아울러 바야흐로 혁명운동의 선봉임을 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어서 도저히 당분간 원만한 결합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됨. 그간 독립당 측에서는 행정의 가장 중요한 구역인 上海 일대가 李春山의 체포 이래 유야무야 형세가 되어 시들하고 느른해져 부진한 경향이 있을 때 한편 애국단 방면에서 근래 부하에게 비밀리에 위촉하여 프랑스조계 일대에 불온 세력을 더하려는 기세가 있음. 安恭根, 安敬根의 이면적 활동에 대해 金東宇, 金玄九 등은 그 이면적 운동자로서 활약하는 듯하며, 독립당원으로서 몰래 애국단에 들어가 행동하려는 자가 있는 상황이라 하여 우려하고 있으며,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애국단 일파가 玉觀彬 외 車利錫, 金弘叙, 玉成彬, 李星鎔, 崔錫淳도 암살하려고 예정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자못 우려하여 지난달 15일의 독립당 區會에서도 대 애국단과의 알력 완화에 관해 결의한 사정이 있음. 그런데 최근 전기 차리석 등 피살 예정의 소문이 있는 5, 6명은 연명으로써 그 사실의 철저한 조사 및 이에 기인하는 독립당원 無辜怨殺 등 불상사의 미연 방지를 독립당 중앙(이사회)에 청원하겠다고 말함. 이 항쟁은 당분간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 되어가는 형편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임"이라고 보고했다.<ref name=":0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0900|제목=90. 金九 일파의 愛國團 대 獨立黨의 알력 상황에 관한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김구는 [[안창호]]의 후견인 [[옥관빈]]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1&aid=0002976678&sid1=001|제목=[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서울신문}}</ref>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1894년)|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3_0030_01640|제목=164. 김규식 외무장이 리한에게 보낸 서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과 [[엄순봉]]이 [[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으며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않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42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2|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하지만 다른 일본 자료에선 김구가 언급되어 있다. <ref name=":03" /><ref name=":36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38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1|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 name=":442">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ref>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ref name=":452">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8</ref>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은 예비후보부터 제외되어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ref name=":462">《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 name=":472">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 name=":48">《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ref name=":49">《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ref name=":50">{{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제목=친일인명사전 예비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5~1037</ref>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8ed81010077e478a9a3f02fd58ebfe64|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10-24}}</ref>)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그 결과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 결론이 나왔다.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ref>검색결과 2020년 10월 18</ref> 구글 학술검색은 논문 검색 사이트이다.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0f8b56629df44c009c39eeb4ecbadf4e|제목=네이버백과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93449b71482c41d885e831275e9a9ee7|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 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음'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지 않는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라 설명된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명백히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수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blockquote>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785|제목=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에 대해서|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3일}}</ref></blockquote>편찬위원회는 수록되지 않는 인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blockquote>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의신청 사유가 다소라도 개연성이 있어 보이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설령 이의신청이 없더라도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을 거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3일}}</ref></blockquote>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이 이유라 설명하였다.
 
 
옥관빈이 친일파란 주장하는 전거가 검토됐음에도 옥관빈은 수록되지 않았다. 옥관빈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라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난다.
 
[[1936년]]소수파의 [[3월학자의 12일]] [[조선총독부]]견해에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111" />의하면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6">{{서적 인용|제목=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성=이호룡|이름=|날짜=2008년 8월 11일|판=|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70|장=}}</ref>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4">{{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09|장=}}</ref>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74402">{{서적 인용|제목=玉觀彬의 상해 망명과 활동|성=김광재|이름=|날짜=2011년 12월 00일|판=한국근현대사연구 제59집|출판사=한국근현대사학회|쪽=46|장=}}</ref>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45392">{{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69&aid=0000363781&sid1=001|제목=김구의 지령 받고 이중첩자로 활약한 애국지사 한도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일보}}</ref>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373">{{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1071292&sid1=001|제목=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성=|이름=|날짜=2005-08-10|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그러나 손세일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ref>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ref name=":382">{{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17-218|장=}}</ref>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ref name=":382" />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0일}}</ref>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 "밀고"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ref name=":332" />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362" />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일"은<blockquote>명사
 
*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28e944fae422448d884eb1cc04c87768|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ref>
</blockquote>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blockquote>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311660d7538e4788896f91e2f59e0c30|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10-24}}</ref>
</blockquote>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ref>김다혜, 친일파 및 친일 행위 내용에 관한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서술 분석,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2018, 10~11</ref> 해당 논문의 정의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두가지 의미라 나온다.<blockquote>사전적인 의미에서 따져보면 반민족행위자란 민족을 반역한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민족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할 경우 민족반역자는 근대 민족이 형성된 이후 반민족행위자는 친일세력 외에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매우 넓은 용어라 하겠다. 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 국사편찬위원회의 <반민특위 특별조사부 조사 기록> 해제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ntroduction/intro_an.html|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an&fileName=intro_an.pdf|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 해제 PDF|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다른 두가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되는 "친일"은 일제의 침략을 당한 일반인의 기준이다.<blockquote>"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일반인의 국어사전 의미는<blockquote>"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f68ff92ab0ae437f8f22c30fb4da4ac0|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니깐 일반인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 특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해당되지 않는다. 애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애초에 일본인으로서, 친일인명사전에 설명하는 친일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인데 일본인은 일제에게 침략당한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 즉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하는 "친일"은 일본인이 인식하는 "친일"이 아니라 피침략된 조선의 일반인이다.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ref>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ref>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blockquote>20. 경제
 
20-1.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20-2. 국책 경제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ㆍ식산은행 등)과 경제 단체의 간부
 
20-3. 군수품 제조업체의 책임자
 
20-4. 기고ㆍ광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합리화하고, 전쟁 물자 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분류기준 경제부문)<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799|제목=친일파를 분류하기 위해 모두 24개 분야를 설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0일}}</ref></blockquote>친일인명사전의 경제부문 친일파 기준을 확인해보아도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친일파(반역자/부역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옥관빈의 경제활동은 중국에서는 한간이 아닌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으며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옥관빈의 암살범을 찾으려는 옥성빈도 암살됐다. 역사학자가 아닌 언론인인 손세일은 옥성빈도 친일파라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제목=蔣介石과 面談하고 洛陽軍官학교에 韓人특별반 설치|성=손세일|이름=|날짜=|웹사이트=조선일보|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4일}}</ref>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 name=":442" />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ref name=":452"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성빈이 예비에서 제외되었다.<ref name=":462" />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 name=":472" />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 name=":48" /> 편찬결과물에 옥성빈이 제외되었다.<ref name=":49" />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ref name=":50" />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음라 결론이 나왔다.
 
==== 임시정부 이동시기 (1932~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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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ref name="fff">[http://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2t05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5쪽].</ref>
 
===== 옥관빈 암살 (1933) =====
[[김구]]는 [[1933년]] [[8월 1일]] 발생한 [[옥관빈]]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ref name=":38">{{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81&aid=0002976678&sid1=001|제목=[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성=|이름=|날짜=2019-02-14|웹사이트=|출판사=서울신문}}</ref> 이 무렵 대표적인 [[친일파]]로 독립운동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인물은 [[옥관빈]]이었다.<ref name=":39">{{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제목=孫世一의 비교 評傳 (5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 蔣介石과 面談하고 洛陽軍官학교에 韓人특별반 설치|성=|이름=|날짜=2006-09-10|웹사이트=|출판사=월간조선|확인날짜=}}</ref><ref name=":332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28_0010_01000|제목=100. 최근 불령선인의 흉폭 행위 개요|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 name=":11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ad_196_0380|제목=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1|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 name=":44" /><ref name=":74" /><ref name=":45" /> 그는 일찍이 국내에서 [[김구]]와 함께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었고, [[3·1 운동]] 뒤에는 상해로 건너와서 [[안창호]]의 측근으로서 임시정부활동에도 참여했다가, 임시정부활동이 쇠퇴해지자 임시정부를 떠나서 '慈藥敞(자약창)'이라는 제약회사와 '三德洋行(삼덕양행)'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아 상해의 유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돈으로 신문사를 포섭하고, 상해정부의 고급관리는 물론 경제계와 종교단체와도 교분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호화주택을 가지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렸다. 그는 독립운동기관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일본군대를 위하여 2만원 상당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정보를 밀고하는 등 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ref name=":39" /><ref name=":46" /><ref name=":74" />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떠나고 없는 [[상하이시|상하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만주사변 이후에 상해로 집결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정화암]], [[유자명]], 李康勳(이강훈), [[백정기]]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31년]] 9월경에 조직한 것이었다.<ref name=":39" />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1931년]] 11월 중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주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실행할 연맹의 행동대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ref name=":39" /> [[김구]]는 중국인들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자금은 확보했으나 일을 수행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사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자금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인력이 합작하여 [[옥관빈]]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 일은 [[김구]]·[[안공근]]·[[정화암]] 세 사람만 알고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ref name=":39" />
 
[[1933년]] [[7월 22일]]~[[7월 23일]] 경 [[옥관빈]]이 [[일본]] 군대를 위하여 약 2만원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 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밀정행위를 한 사실이 포착되었다.<ref name=":47">{{서적 인용|제목=1930년대 예술문화운동|성=한국민족운동사학회|이름=|날짜=2003|판=|출판사=국학자료원|쪽=273|장=}}</ref> 이에 [[오면직]]과 [[엄형순]]은 [[정화암]]과 연락을 취하면서 [[옥성빈]](玉成彬, 옥관빈의 형)의 집 맞은 편 중국인의 집 2층에 수일간 잔복하며 사살할 기회를 엿보았다.<ref name=":47" /> [[김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정화암]]은 자전거 몇 대를 구입하여 [[옥관빈]]의 신원추적에 착수했다. 두 달 동안 추적한 끝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무국 경찰로 근무하는 그의 종형 [[옥성빈]](玉成彬)의 집 뒤쪽 정자칸 방에 사는 [[흥사단]] 단원 이아무개의 부인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 집에 드나들었다. 이아무개는 漢口에서 소규모의 세발자전거 공장을 차리고 있어서 집을 비우고 있었다.<ref name=":39" /> [[옥관빈]] 암살은 [[김구]]의 심복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있는 [[오면직]](吳冕稙)과 [[엄형순]]이 맡았다.<ref name=":39" />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ref name=":3323" />
 
[[1933년]] [[8월 1일]] 저녁 9시 무렵 [[옥관빈]]이 [[옥성빈]]의 집에서 나올 때에 기다리고 있던 [[엄형순]]이 자동차로 접근하여 권총 세 발을 쏘았고, [[옥관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ref name=":39" /> 다른 문헌에 따르면 [[1933년]] [[8월 1일]] 밤 12시([[8월 2일]] 0시 경)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이모씨의 처와 [[간통]]하고 나오던 중 이모의 집 근처에 숨어있던 [[엄순봉]]의 총격을 받았다. 총소리에 놀란 동네 주민들과 경찰관들이 '강도야! 도적이야!' 소리치며 몰려오자 [[엄형순]]은 '강도가 저 쪽으로 뜁디다'고 말하고는 유유하게 나왔다.<ref name="hoi409">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409페이지</ref> [[1933년]] [[8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차에서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03_w0002_0390|제목=上海 法界에서 玉觀彬被殺, 친척의 집을 방문하려든 중 數名靑年이 突然狙擊[肖]|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옥관빈]]의 피살은 한인동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옥관빈]]을 암살한 뒤에 [[김구]] 쪽에서는 [[1933년]] [[8월 8일]]에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 이름으로 '역적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함'이라는 斬奸狀(참간장)을 작성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인신문과 중국신문에 배포했다.<ref name=":39"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15_x0002_0820|제목=玉觀彬暗殺은 思想團所爲? 「○○除奸團 罪狀宣布로」 中國側에 一大衝動(上海)//玉觀彬氏屍體 平壤에 安着|성=|이름=|날짜=1933-08-15|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pda_1933_08_15_x0002_0820|제목=玉觀彬暗殺은 思想團所爲? 「○○除奸團 罪狀宣布로」 中國側에 一大衝動(上海)//玉觀彬氏屍體 平壤에 安着|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33년]] [[9월 1일]] 《삼천리》 제5권 제9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상해 [[옥관빈]] 씨가 피살 당하였다. 그는 [[안창호]]의 부하로 있어 일도 많이 하다가, 정계에서 발을 끊고 실업에 종사하여 벌써 10년,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거부를 이루었다. 각금 운동자금을 달라고 가면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버는 목적이 있다' 하고 모두 거절하여 왔으며 이것이 원한에 의한 피살(含怨被殺)의 주원인이라 한다."<ref name=":5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ma_016_0370_0170|제목=玉觀彬氏의 豪語|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당시 [[일본 제국]]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ref name=":3323" />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ij_043_0030_01640|제목=164. 김규식 외무장이 리한에게 보낸 서한|성=|이름=|날짜=1933-09-20|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옥관빈]]이 암살되자 [[옥성빈]]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있던 [[친일파]]였다. [[옥성빈]]도 넉 달 뒤인 [[1933년]] [[12월 18일]] 오후 6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해산(金海山)의 집 입구 길가에서 암살되었다.<ref name=":39" /><ref>{{서적 인용|제목=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한국 아나키즘을 돌아본다)|성=이호룡|이름=|날짜=2008-02-20|판=|출판사=서해문집|쪽=94|장=}}</ref><ref name=":74" />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111" />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6">{{서적 인용|제목=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성=이호룡|이름=|날짜=2008년 8월 11일|판=|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70|장=}}</ref>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4">{{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09|장=}}</ref>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74">{{서적 인용|제목=玉觀彬의 상해 망명과 활동|성=김광재|이름=|날짜=2011년 12월 00일|판=한국근현대사연구 제59집|출판사=한국근현대사학회|쪽=46|장=}}</ref>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45">{{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 김원봉과의 갈등과 한국국민당 창립 (1935~19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