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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은 중국 국적인데 타인의 국적이 근거없이 부정되고 있습니다. 옥관빈은 법적으로 중국인이었고 실제 중국국민당 간부였고 중국 내에서 애국자로 평가받는 증거가 서술됐는데 타인의 국적이 정당한 이유없이 부정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어디에도 출생한 곳을 국적으로 서술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출생한 곳이 무조건 국적'이란 이상한 논리로 실존인물의 국적이 부정되고 있는데 옥관빈은 명확히 중국인이었고 이건 증거가 명확합니다. 자꾸 '출생한 곳이 국적'이란 이상한 이유로 중화민국 국적과 실제 충성했다는 증거들이 삭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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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玉觀彬, [[1891년]] [[1월 18일]]<ref>[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4&actionType=name&indpnId=0000003051 경성지방법원 판결문]</ref> - [[1933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에서 출생하여 중화민국 국민으로 귀화하기 이전에는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업인이었으나 후에 조상이 화교인 것을 근거로 중화민국에 귀화해 한국계 중국인이 되어 [[중화민국]]에 충성하는 중국의 애국자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의 한사람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 고문을 당했으나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1864년)|이승훈]]·임치정 등 6명과 함께 주모자로 몰려 4년의 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ref>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한길사, 2009) 35페이지</ref> 그 후 중국으로 이민을 가 조상이 화교라는 점을 근거로 [[중화민국]]에 귀화하였다. 옥관빈의 조국인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ref> 이에 비해 한국의 독립운동엔 거리를 두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자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댄다는 것을 떠벌리며 나라도 되니까 너희에게 돈을 주는게 아니겠느냐며 무시하거나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고 다니며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분노를 사고말았다.<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