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 도브리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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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정보
|이름 = 아나톨리 도프리닌 <br /> Анато́лий Добры́нин
|원래 이름 = {{lang|ru|Anatoly Fyodorovich Dobrynin}}
|그림 = AF Dobrynin 01.png
|크기 = 250픽셀
|직책 = [[소련의 미국]] 대사주재 [[소련]] 대사
|임기 = 1962년 1월 4일 ~ 1986년 19월 5일
|전임 = [[미하일 멘시 코프멘시코프]]
|후임 = [[유리 두비 닌두비닌]]
|출생일 = {{출생일|1919|11|16}}
|출생지 =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현]] 모자이스키 우예즈드 크라스니야 고르카
|출생지 = [[프랑스]] [[릴]]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2010|4|5|1919|11|16}}
|사망지 = [[모스크바러시아 연방|러시아]] [[러시아모스크바]]
|정당 = [[소련 공산당]] (1946년 ~ 1991년)
|배우자 = 이리나 도프리니나
}}
'''아나톨리 표도로비치 도프리닌'''({{llang|ru|Анато́лий Фёдорович Добры́нин}} [[1919년]] [[11월 16일]] ~ [[2010년]] [[4월 6일]])은 [[소련]]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개 이상의 10년의 세월 동안 [[미국]] 주재 소련 대사였다.
 
그는 자신의 대사직의 시작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동안과 그 후에 미국의 대중들 중에 평판을 끌어들여 비록 [[쿠바]]에서 소련의 [[미사일]]의 존재를 거부했을 때 소련의 수상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미 그들에게 보내면서 미국인들이 이미 그 사진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며칠 후까지 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1968년]]과 [[1974년]] 사이에 그는 [[헨리 키신저|키신저]]-도브리닌 직접 교섭과 [[미국 대통령]]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사이에 협상 연결에 관한 소련의 끝으로 알려졌다.
'''아나톨리 도프리닌'''(Anatoly Fyodorovich Dobrynin [[1919년]] [[11월 16일]]~[[2010년]] [[4월 6일]])은 [[러시아인|러시아]] [[정치가|정치가]] [[소비에트 국민]], [[외교관]], [[정치인]]. 그는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0년 이상 미국에 주재한 러시아 대사였다.
 
== 초기 생애와 교육 ==
그는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대사관 개통 초기에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탔다.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소련 총리 인 니키타 흐루시초프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미 그들을 보냈고 미국인들은 이미 그들에 대한 사진을 가지고있었다. 1968 년과 1974 년 사이 그는 [[헨리 키신저|키신저]]의 소비에트 연방의 종착역으로 알려졌다. - 도프리닌과의 직접 통신 및 협상은 [[리처드 닉슨|미국 대통령직]과 공산당의 정치국 소련의 파티|소련 정치국]].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모스크바현]] [[모자이스크]] 근처에 있는 크라스나야 고르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자물쇠]] 제조공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 연구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졸업 후에 [[야코블레프]]를 위하여 일하러 갔다. [[1944년]] 고등 외교 학교에 입학하여 영예와 함께 졸업하였다.
 
== 경력 ==
[[파일:John F. Kennedy, Anatoly Dobrynin.jpg|섬네일|왼쪽|[[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도프리닌은 [[1946년]] 소련 외무부의 외교 서비스에 가입하였다. 그는 후에 외무부의 사무국에 가입하여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드미트리 셰필로프]],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발레리안 조린]]을 위하여 일하였다. 그는 [[1957년]] [[유엔]]에서 사무부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 외무부의 [[미국]]과 [[캐나다]] 담당부의 우두머리로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962년]] 도프리닌은 미국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었고, [[1979년]] [[7월]] 이래 외교단의 주임을 지내왔다. 그의 대사 재직 기간은 [[1986년]]까지 지속되었다.
 
도프리닌은 6명의 [[미국 대통령]]들 ([[존 F. 케네디|케네디]], [[린든 B. 존슨|존슨]], [[리처드 닉슨|닉슨]], [[제럴드 포드|포드]], [[지미 카터|카터]]와 [[로널드 레이건|레이건]])의 기간 동안 소련 대사로소 지낸 특이한 경험을 가졌다. [[냉전]]의 경쟁은 그의 직위를 전자를 통해 전달되는 대부분의 외교 사업인 미국 주재 소련 대사 ([[워싱턴 D. C.]])와 소련 주재 미국 대사 (모스크바) 사이 같은 소련-미국 관계에서 주요 요소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미국 국무부]]와 도프리닌의 정규적인 연락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그 권리를 취소했을 때 그가 [[1981년]]까지 국무부의 차고에서 그의 주차 자리가 부여된 결과를 가져왔다.
 
도프리닌은 자신이 가끔 만나고 한주에 4번이나 함께 식사를 했던 [[헨리 키신저]]와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사무실로 직통 전화를 가졌는데 선물들을 교환하였고, 내부의 농담들을 나누었으며 서로의 부모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71년]] 그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선출되었다. 미국 주재 대사로서 자신의 장기적 기간 후에 그는 [[1986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당의 비서실에 가입하여 2년 동안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국제부를 지도하였다. [[1988년]]의 말기에 그는 중앙위원회로부터 퇴직하여 소련 대통령에 조언자를 지냈다.
 
그는 [[1989년]] [[12월]] 냉전의 종말에 특정을 지은 [[몰타 회담]]에 참석하였다. 그는 [[1992년]] 러시아의 특명 전권 대사의 명예 계급이 주어졌다.
 
== 저서와 사망 ==
그의 저서 〈자신감을 가지며 : 6명의 냉전 대통령들에게 모스크바의 대사〉가 [[1995년]]에 출판되었다.
 
도프리닌은 [[2010년]] [[4월 6일]] 모스크바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도프리닌의 가족에게 전보에서 [[러시아 연방|러시아]]의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도프리닌에게 경의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blockquote>
{{인용문|재능이 있고 기억에 남는 인물, 최고 수준의 전문인이며 러시아 외교의 전설 아나톨리 도프리닌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러시아와 지구촌의 외교 정책에서 전체의 변화들이 일어난 시대와 함께 교제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고 소련-미국 관계를 정상화한 아나톨리 도프리닌의 개인적인 공헌을 과대 평가할 수 없다.
 
협상자와 분석가로서 그의 뛰어난 능력들은 그에게 동료와 상대들 둘다의 존경을 얻게 하였고, 그의 선의, 깊은 지식과 풍부한 삶의 경험은 그에게 그의 주위에 모든이들의 존경과 기호를 얻게 하였다.}}</blockquote>
 
== 영예와 수상 ==
* [[사회주의 노동영웅]]
* 5개의 [[레닌 훈장]]
* [[노동적기훈장]]
* 러시아 연방의 외교 정책으로 위대한 공헌과 많은 세월의 외교 서비스로 명예 훈장 (2009년 8월 18일)
* 러시아 연방 외교 서비스의 명예 노동자
* 러시아 국립 외교원의 명예 박사
 
==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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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인물들}}
 
{{전거 통제}}
 
{{기본정렬:도프리닌, 아나톨리}}
 
[[분류:1919년 태어남]]
[[분류:2010년 죽음]]
[[분류:소련의 외교관]]
[[분류:냉전기의 외교관]]
[[분류:미국 주재 소련 대사]]
[[분류: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분류:사회주의 노동영웅]]
[[분류:노동적기훈장 수훈자]]
[[분류:레닌 훈장 수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