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초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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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耶律楚材, [[1190년]] [[7월 24일]]([[음력 6월 20일]]<ref name=a>『원문류』 권57, 중서령 야율공 신도비</ref>) ~ [[1244년]] [[6월 20일]]([[음력 5월 14일]]<ref name=a/>))는 [[몽골 제국]]의 정치가이자 [[지식인]]으로 자는 진경(晉卿)이다. 학문이 뛰어나서 [[칭기즈 칸]]이 아낀 인물이다.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 성장과정생애 ==
야율초재는 [[금나라|금]](金)의 수도 [[중도 (금나라)|중도]](中都, 지금의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춘추좌씨전]]》 양공 26년조에 나오는 "초(楚)나라에 인재가 있는데 진(晉)나라에서 이를 데려다 썼다"(雖楚有材,晉實用之)라는 전고(典故)을 따라 아들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야율초재의 집안은 옛 [[요나라|요]](遼, 거란)의 태조(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장남인 [[동단국]](東丹国) 회왕(懐王, 의종義宗 ・ 천양제天譲帝) 야율돌욕(耶律突欲)의 8세 손으로, 요의 종족(宗族) 출신이자 거란인인데, 대대로 중국의 문화에 친숙하여 한화(漢化)된 가계(家系)였다. 요 왕조가 금에 멸망한 뒤에는 금 왕조를 섬겼으며, 할아버지 야율율로(耶律聿魯), 아버지 야율복(耶律履)은 금의 제도에 따라 재상급의 중직인 상서우승(尚書右丞)에까지 올랐다. 야율초재는 그의 아버지가 고령에 얻은 셋째 (막내) 아들이었으며, 세 살 때에 아버지가 61세로 사망하였으므로 한인(漢人) 출신인 어머니 양씨(楊氏)에게 엄한 교육을 받았다. 모친의 영향으로 [[학문]]에 힘썼다. 야율초재의 어머니는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같다며 학문을 권했다고 한다. 또한 이복형 야율변재(耶律弁才) ・ 야율선재(耶律善才)는 야율초재와는 20살 넘게 차이가 났고, 그는 생모와 함께 그의 형들로부터 양육받았다.
 
성인이 되어 야율초재는 재상의 아들로써 과거가 면제되었고, 代替の試験を대체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고 상서성(尚書省)의 하급관료로 임관하였다. 몽골 제국이 금에 쳐들어 왔을 때는 수도 중도에서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을 맡고 있었는데, [[1214년]]에 중도가 함락되고 포로가 되었다. 야율초재는 명문 출신에 키가 크고 수염이 길었으며 태도가 당당하였고, 중국의 천문학과 복점(卜占)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눈에 들어, 중국어 담당 서기관(비치크치)가 되어 칸의 측근으로써 출사하게 된다. [[1219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원정에도 칭기즈 칸의 본대를 수행하며 칸의 측근에서 점성술사로써 일했고, [[서역]]에서 약 6년을 머무르면서 각지의 길·마을·산천·산물과 도중에서 겪은 체험과 시작(詩作)을 《서유록》(西遊録)으로 남겼다.
 
칭기즈 칸이 죽은 뒤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쿠릴타이가 열렸을 때, 칭기즈 칸의 유지를 존중하여 우구데이를 세울 것을 설득하였고, 우구데이의 즉위에 크게 공헌하였다. 다만 몽골 귀족이 아니었던 야율초재가 쿠릴타이에 출석해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이 일화는 중국에서 편찬된 《원사》 등의 사료에만 전해지는 이야기로써 그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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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는 청빈을 미덕으로 준수하였으며, 그가 남긴 유산은 거문고와 책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시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저서로 《잠연거사집》(湛然居士集)을 남겼다.
 
부인 양씨(梁氏)가 낳은 장남 야율현(耶律鉉)이 서른 전후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정씨(鄭氏, 소씨蘇氏라는 설도 있다)가 낳은 막내아들 야율수(耶律鋳)가 그 뒤를 이었다. 훗날 야율수는 적자 야율희량(耶律希亮)과 함께 [[쿠빌라이 칸]]을 섬겨서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 누차 승진하였기 때문에 야율초재 역시 재평가되어 태사(太師)、상주국(上柱国)으로 추증되고 광녕왕(広寧王)으로 추봉되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붙여졌다.
 
== 야율초재의 실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