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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 B 285 Bild-04413, KZ Auschwitz, Einfahrt.jpg|300px|섬네일|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llang|he|השואה}}, {{llang|yi|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나치 독일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인 [[러시아]]인 및 [[폴란드]]인과,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최대2천6백만1천1백만 명이 넘는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ref name=NYT030113>{{뉴스 인용 |title=The Holocaust Just Got More Shocking |url=http://www.nytimes.com/2013/03/03/sunday-review/the-holocaust-just-got-more-shocking.html |accessdate=2 March 2013 |newspaper=The New York Times |date=1 March 2013 |author=Eric Lichtblau}}</ref> 사망자 중 러시아인과 폴란드인 집시 등 피해자가 최대 약 1900만명이었다. 유태인은 최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ref>{{Harvnb|Dawidowicz|1975|p=403}}.</ref>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ref>{{Harvnb|Fitzgerald|2011|p=4}}; {{Harvnb|Hedgepeth|Saidel|2010|p=16}}.</ref> 나치는 유태인과 폴란드인과기타 러시아인, 집시, 그외 피해자들을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한구금되어 죽게 학살했다되었다. 잘 알려지 않은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집시 피해자들 최대 인원이 유태인 피해자들보다 훨씬 많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나치 강제 수용소|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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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ref>{{Harvnb|Dawidowicz|1975|p=47}}; {{Harvnb|Bauer|1982|p={{쪽|날짜=2014-05-05}}}};</ref>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반유대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이러한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ref>{{Harvnb|Gramel|1992|pp=53–4}}.</ref>
 
1895년, 옛 독일 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ref>{{Harvnb|Gramel|1992|p=61}}.</ref>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ref name = "Friedländer 1997 76">{{Harvnb|Friedländer|1997|p=76}}.</ref>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ref name = "Friedländer 1997 76"/>
 
독일 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ref name = "Evans 1989 69">{{Harvnb|Evans|1989|p=69}}.</ref>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ref>{{Harvnb|Friedlander|1994|pp=495–6}}.</ref>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ref>{{Harvnb|Fischer|2002|pp=47–51}}.</ref>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ref>{{Harvnb|Peukert|1994|pp=280–284}}.</ref>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ref>{{Harvnb|Peukert|1994|pp=279–280}}.</ref>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ref>{{Harvnb|Peukert|1994|p=280}}.</ref>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ref>{{Harvnb|Peukert|1994|p=28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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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적 탄압과 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