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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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이 글은 1813년 드레스덴 전투를 설명한 것입니다. 드레스덴 폭격을 설명한 전투는 [[드레스덴 폭격]]을 참고하십시오.}}
{{전쟁 정보
|분쟁=드레스덴 전투
|전체=[[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
|그림=Battle of Dresden by Naudet.jpg
|그림크기=300px
|설명=
|설명=드레스덴 전투 그림
|날짜=[[1813년]] [[8월 26일]]~[[8월 27일]]
|장소=현재 [[독일]] [[작센]] [[드레스덴]]
|결과=[[나폴레옹]]의프랑스의 결정적 승리
|이유=
|교전국1= {{국기그림|프랑스}} [[프랑스 제1제정|프랑스 제국]]
|교전국2= [[파일: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21px]] [[오스트리아 제국]] <br /> [[파일:Flag of Prussia (1803).gif|21px]] [[프로이센 왕국]] <br /> [[파일:Russian Empire 1914 17.svg|25px]] [[러시아 제국]]
|지휘관1= {{국기그림|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br /> {{국기그림|프랑스}} [[로랑 구비옹 생 시르]]
|지휘관2= [[파일: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21px]] [[슈바르첸베르크 공 카를 필리프 슈바츠첸베르크]]
|병력1= 135,000명
|병력1= 12만 명 <br /> 드레스덴 수비대 2만 명
|병력2= 17만 명214,000명
|사상자1= 1만 명 사상~10,000명
|사상자2= 3만~38,000명,<br>대포 8000명 사상40문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드레스덴 전투'''는 [[1813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나폴레옹]]이 [[독일]] [[작센 공국]] [[드레스덴]] 외곽에서 벌인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해 허사가 되었다.
 
'''드레스덴 전투'''는 [[1813년]] [[8월 26일]]에서 27일 동안 독일에서 벌어진 전투로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이 야전원수 [[슈바르첸베르크 공 카를 필리프|슈바르첸베르크]](Schwartzenberg) 휘하의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소속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러시아]], [[프로이센]]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승리는 이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완벽하지 않았다. 전투 후에 지속적인 추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며칠 후 프랑스 군의 측면을 담당하는 부대가 포위되어 [[쿨름 전투]]에서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 전투 과정 ==
 
[[오스트리아]]의 [[카를 필리프 슈바츠첸베르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동맹군은 [[독일]] [[드레스덴]] 점령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8월 23일 로랑 구비옹 생 시르가 이끄는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드레스덴]] 수비대가 위협을 받자 [[나폴레옹]]은 증원군을 보냈다. 이때 이 증원군의 장정은 역사상 유명한 장정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이 행군에서 제국 수비대는 3일 동안 145km, 새로 징집된 두 군단은 4일 동안 190km를 행군했다. 전투 첫날에는 7만 명, 둘째 날에는 12만 명이 참전했으며, 그 동안 [[로랑 구비옹 생 시르]]는 많은 방어물을 구축했다. [[8월 26일]] 슈바츠첸베르크의 측면 부대가 독일 [[엘베 강]]에서 쉬고 있는 동안 나머지 부대가 커다란 반원형으로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해 구비옹 생 시르가 이끄는 수비군은 동맹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도착하자 오후에 동맹군을 다시 원위치로 후퇴시켰고 다음날 아침 [[8월 27일]]에 공격을 시작해 비가 와 땅이 질척거려 보병과 기병이 제대로 싸울 수 없어 기동성이 우수한 프랑스 포병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동맹군은 3만 8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고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1만 명의 사상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해 이 전투의 승리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서막==
[[8월 16일]] [[나폴레옹]]은 [[로랑 구비옹 생 시르|생 시르 원수]](Marshal Saint-Cyr)를 보내 연합군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아군의 기동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자 드레스덴을 요새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적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전군이 집결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연합군의 총병력은 450,000명이었고, 이에 대항하는 나폴레옹의 병력은 300,000명이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트라첸베르크 작전]](Trachenburg Plan)에 따라 나폴레옹 본인이 지휘하는 부대와의 싸움을 피하고 휘하의 사령관이 지휘하는 부대를 선택하여 싸움을 걸고 있었다. [[8월 23일]] 독일의 남부에서 벌어진 [[그로스비렌 전투]](Battle of Grossbeeren)에서 스웨덴의 [[스웨덴의 카를 14세 요한|왕세자 카를]](Crown Prince Charles of Sweden; 이전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자 프랑스의 원수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가 자신의 옛 동료이기도 했던 [[니콜라 우디노|우디노 원수]](Marshal Oudinot)를 격파하였다. [[8월 26일]] 프로이센 원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블뤼허]]가 [[카츠바흐 전투]]에서 [[자크 마크도날|마크도날 원수]]를 물리쳤다.
 
[[분류:프랑스의 전투]]
 
== 전투 과정 ==
카츠바흐 전투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 슈바르첸베르크 원수는 200,000명에 달하는 보헤미아의 오스트리아군이 이끌고, 오스트리아 황제, 러시아 차르, 프로이센 왕과 함께 생 시르 원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생 시르 원수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병을 이끌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재빨리 진군하였다. 수적으로 2대 1의 상황이었음에도 나폴레옹은 다음날이 [[8월 27일]]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고, 동맹군의 좌측을 공략하여 아주 인상적인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나폴레옹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경련으로 인해 전장을 떠나야 했고, 프랑스군은 슈바르첸베르크가 포위망의 좁은 구멍을 통해 퇴각하도록 허용해 버려 승기를 얻어 연합군을 궤멸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연합군은 38,000명의 병력과 40문의 포를 잃었고 프랑스군은 약 10,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휘하의 장교 중 한명은 나폴레옹이 "전투 중에 계속 밖에서 지휘를 하느라 차가운 비를 맞았고, 이로 인해 담에 문제가 생겼다."라고 기록하였다.<ref>{{cite web|url=http://www.peterswald.org/geschichte/Pete_rovigo.html|제목=Memoirs of the Duke of Rovigo|publisher=Peterswald}}</ref>
 
 
==영향==
[[도미니크 방담|방담]](Vandamme) 장군은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이탈해 버린 상황에서도 생 시르 나 다른 원수들의 지원 없이 능동적으로 행동하여 슈바르첸베르크를 추격하였다. 그로서는 이것이 황제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쿨름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참조==
<references/>
 
==외부 링크==
* [http://www.the-art-of-battle.350.com/The_Battles.htm Battle of Dresden animated battle map] by Jonathan Webb
* [http://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DRESDEN.htm Battle of Dresden 1813 - maps, illustrations]
* [http://www.Peterswald.org/geschichte/Pete_rovigo.html Memoirs] [[Anne Jean Marie René Savary|of the Duke Rovigo]]
 
 
[[분류:1813년]]
[[분류:오스트리아의 전투]]
[[분류:프로이센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