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데 메디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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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평화는 1494년에 [[나폴리 왕국]]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알프스]]를 넘은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번 원정은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 (루도비코 일 모로)가 그의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몰아내고 밀라노 공작이 되기 위해서 프랑스에 요청한 원정에 부응하여 시작된것이기도 하였다.
 
밀라노에서의 일이 마무리 된 후, 샤를은 나폴리로 향하였다. 그는 [[토스카나]]를 통해서 지나가야만 했고, 게다가 밀라노와의 연락이 확보가 되어야만 했었다. 피에로는 중립을 취했지만, 이는 토스카나를 침공하려던 의도를 지녔던 샤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에로는 저항을 시작하였지만 광신도의 성격을 띈 도메니코회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하에서 몰락한 피렌체 엘리트 계층들의 얼마안되는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그의 친척들은 샤를의샤를 8세의 세력에 가담했다.
 
피에로는 샤를의 군대가 피렌체에 인접해지고 토스카나의 주요 요새가 침략군에 포위되자, 재빨리 항복하였으며, 샤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말았다. 그의 실망스러운 상황 처리와 협상 실패는 피렌체에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메디치 가문은 도주를국외로 도피 해야 하였다. 가문의 궁전은 약탈되었으며, 추가적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형태의 핵심이 메디치 가문원 전체가 추방되며, 다시 세워졌다. 메디치 가문 인사는이후 1512년까지 피렌체를피렌체에 통치하지대한 못했다통치권을 상실하였다.
 
[[필리프 드 코민]]의 도움으로, 피에로와 그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로 도망을 갔다. 1503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나폴리 왕국]]을 두고 이탈리아에서 분쟁을 계속 벌이자, 피에로는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가릴리아노 [[가릴리아노 전투|전투]]에서 패배후 가에타로 후퇴하전중 [[가릴리아노 강]]에서 익사하였다.<ref>G.F.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7.9, p266</ref> 대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싣고 가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의 유해는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