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 데 메디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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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서의 일이 마무리 된 후, 샤를은 나폴리로 향하였다. 그는 [[토스카나]]를 통해서 지나가야만 했고, 게다가 밀라노와의 연락이 확보가 되어야만 했었다. 피에로는 중립을 취했지만, 이는 토스카나를 침공하려던 의도를 지녔던 샤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에로는 저항을 시작하였지만 광신도의 성격을 띈 도메니코회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영향하에서 몰락한 피렌체 엘리트 계층들의 얼마안되는 지원을 받았고, 심지어 그의 친척들은 샤를 8세의 세력에 가담했다.
 
피에로는 샤를의 군대가 피렌체에 인접해지고 토스카나의 주요 요새가 침략군에 포위되자, 재빨리 항복하였으며, 샤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말았다. 그의 실망스러운 상황 처리와 협상 실패는 피렌체에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메디치 가문은 국외로 도피 해야 하였다. [[필리프 드 코민]]의 도움으로, 피에로와 그의 가족들은 [[베네치아]]로 망명하였다. 가문의 궁전은 약탈되었으며 메디치 가문 이후 1512년까지 피렌체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였다.
 
== 사망 ==
[[필리프 드 코민]]의 도움으로, 피에로와 그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베네치아]]로 도망을 갔다. 1503년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나폴리 왕국]]을 두고 이탈리아에서 분쟁을 계속 벌이자, 피에로는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가릴리아노 [[가릴리아노 전투|전투]]에서 패배후 가에타로 후퇴하전중 [[가릴리아노 강]]에서 익사하였다.<ref>G.F.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7.9, p266</ref> 대포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싣고 가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의 유해는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99년 프랑스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1499~1504)이 막바지에 달한 시점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나폴리의 분할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피에로는 프랑스 편에 가담하여 1503년 12월에 벌어진 가릴리아노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군에게 프랑스가 대패하고 말았다.<ref>김종법,임동현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8.8.31 p147</ref> 피에로는 프랑스군과 함께 가에타로 퇴각하던중 [[가릴리아노 강]]에서 익사하고 말았다.<ref>G.F.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7.9, p266</ref> 육중한 대포를 싣고 가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의 유해는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안장되었다.
 
== 혼인과 자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