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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년]], 진주자사로 임명되어, 진국공에 봉해졌다. [[638년]], 이부상서가 되었고, 광녹대부의 자리를 겸하였다. 티벳이 송주를 포위했을 때, 후군집은 당미도 교군대총관이 되어, 티벳을 공격했다.
 
[[639년]], [[가오창]]국문태가[[국문태]]가 서역의 통상로를 차단하여차단하자, 태종이 국문태에 입조를 재촉했지만, 국문태는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당은 후군집을 교하도교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가오창을 토벌하게 했다. [[640년]] 당군이 적구에 도착했을 때, 국문태는 사망하고 그 아들 국지성이 가오창 왕을 잇고 있었다. 후군집이 유곡에 이르렀을 때, 국문태의 장례식 때문에, 가오창의 국민이 모두 집결하고 있는 것을 후기가 보고했다. 여러 장군들은 습격을 건의하였지만, 후군집은 거절하며 「천자는 가오창이 오만무례하여 나에게 천벌을 대행시켰다. 지금 상중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죄를 묻는 스승이 되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후군집은 북을 울려 시위하면서 진군했지만, 가오창의 사람들은 농성전을 벌였다. 후군집은 그들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항복을 거부하자 대량의 공성기를 동원하여 투석차로 돌을 날려 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진격을 계속해 가오창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국지성은 서돌궐의[[서돌궐]]의 원군이 없는 것을 알자, 문을 열어 항복을 하였다. 후군집은 군사를 나누어 가오창의 평정하면서, 비석에 그 무공을 새기게 했다. 국지성과 그 부하들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개선했다.
 
==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