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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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동맹 간부들은 사태를 우려하였고, 과격파 등의 공격으로부터 운영 중인 공항을 지키면서 강제 수용도 병행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판단한 경비 당국과 공항공단 관계자도 이대로는 2기 지구 정비를 매우 어렵다고 보아 개항을 전후하여 반대파와 정부 측 간 물밑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중에서는 각서 체결까지 성공한 사례도 있었지만 정보 누설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ref name="story7278" /><ref name="moyu8085233239">[[#伊藤睦|伊藤睦(2017)]]80-85・233-239頁。</ref> 정부와의 교섭이 신문에 보도되자 대화를 이끌던 반대동맹 간부의 집에는 연일 신좌파의 [[가선차]]가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큰 소리로 "모략 행위"에 대해 욕하며 교섭 시비나 간부의 처우를 둘러싸고 분규하는 반대동맹은 큰 혼란에 빠졌다.<ref name="moyu8085233239" /><ref>[[#大坪景章|大坪景章(1978年)]]495-496頁。</ref>{{sfn|水谷保孝|岸宏一|2015|pp=326-328}} 반대파 농민들은 "당파들은 투쟁에만 열심이지 밥벌이는 도와주지 않는다. 조건(파)이 되면 탄핵당한다"{{sfn|水谷保孝|岸宏一|2015|p=329}}라며 양 파벌 간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이 가운데 2기 지구 내 토지 미매수 지역에서 1평지주운동을 계속 밀고나가는 "1평재공유화운동"을 둘러싸고 반대파 주민 간에 대립이 발생함과 더불어 지원당파의 주도권 다툼이 두드러지면서 1983년 3월 8일 반대동맹은 기타하라 고지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하는 기타하라파와 아쓰타 하지메 행동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아쓰타파로 분열되었다. 기타하라파는 1평재공유화운동을 반대했으며 공항 용지 내 농가가 많았고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 [[혁명적노동자협회 (사회당 사청동 해방파)|혁노협]], [[공산주의자동맹 전기파|공산동 전기파]] 등이 지원하였다. 아쓰타파는 1평재공유화운동을 추진하는 것을 지지하였으며 공항 용지 외 농가가 많았고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 (볼셰비키-레닌주의파)|제4인터내셔널]], [[분트 (시민단체)|전기-공산동]], [[공산주의노동자당|프로청동]] 등이 지원하였다.<ref name="story7278" /><ref name="drum127128" /><ref name="fukuda197198" /><ref name=":41">{{
한편 개항 후에도 [[10·20 나리타 현지투쟁]]을 비솟한 신좌파 운동가의 소요 및 파괴 행위와 [[도테쓰공업 작업원숙사 방화살인사건]], [[지바현 수용위원회회장 습격사건]]같이 관계자를 표적으로 한 [[좌익 테러]]도 여럿차례 일어났으며 더 나아가 반대 운동을 포기하고 공항공단에 토지를 매각하고 이전한 농가를 향한 방화 등 괴롭힘 행위 및 신좌익 당파 내 내부분쟁도 빈발하였다.{{refnest|group=주해|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중요 인물이나 투쟁에서 이탈한 농가 중에서는 "소임은 다했다. 이제 가만히 놔뒀으면 좋겠다"라거나 "과격파의 테러가 무섭다"라고 하며 시간이 지나가도 입을 계속 다물고 증언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ref>[[#大和田|大和田武士 鹿野幹夫(2010年)]]142頁。</ref>}}{{refnest|group=주해|전기파 세력으로 투쟁에 참여했던 [[후카부에 요시나리]]는 "전기파는 [[흑색화약]]으로 화염병을 날리는 장치를 개발하는 등 공항이나 기동대의 시설을 공격하였다. 나 자신도 이 일에 몇 번이나 참여했다. 전기가 성명을 내면 언론이 보도한다. 효율적인 홍보였지만 "죽음도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각오로 움직이고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ref>{{
나리타 공항이 개항한 1978년부터 2017년까지 발생한 산리즈카 투쟁 관련 게릴라 사건은 총 511회이며 이는 해당 기간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 게릴라 사건 919건 중 절반에 해당된다.<ref>{{
=== 정부의 사죄와 화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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