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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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나가는 기요마사와는 달리 [[이시다 미쓰나리]]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힘썼는데, 조선측은 이를 몇 번이나 거부 또는 묵살하였고, 기요마사는 이를 두고 "고니시가 조선에서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고도 한다. 명의 개입 초기에는 조승훈(祖承訓) 등이 이끄는 명군의 [[제1차 평양성 전투|평양성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으며(조선측의 평양성 탈환 시도도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때 유키나가의 동생인 [[고니시 요시치로]]({{llang|ja|小西与七郎}})와 사촌 형제 [[고니시 안토니오]]({{llang|ja|小西アントニオ}}), 일문의 [[히비야 아구스도]]({{llang|ja|日比谷アゴスト}}) 등이 전사하였다. 그 뒤 강화 교섭에 강경한 자세로 일관하던 조선 조정 대신 명과 교섭을 시도했고, 명측과 유키나가 양측은 50일간의 휴전과 강화 교섭에 동의했다.
 
그러나 [[분로쿠]] 2년([[1593년]]) 1월에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의 조선 지원군이 평양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유키나가는 명군의 공세에 밀려 한양까지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5월에 [[시마즈 다다토키 (센고쿠 시대)|시마즈 다다토키]](島津忠辰)가 병을 이유로 출진을 거부하다 개역당했을 때는 그의 신병을 살펴주는 등 자국내에서도 활동했다. 한성 주변으로 물러난 [[일본군]]은 진격해 오는 명군을 벽제관(碧蹄館)에서 격파([[벽제관 전투]])했는데, 이때 유키나가의 군은 한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벽제관 전투 이후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다시 한 번 강화 교섭이 벌어졌는데, 유키나가는 명측의 회담 담당자 [[심유경]]과 짜고 히데요시에게 명이 항복했다고 속였고, 명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항복한다고 속여 강화 교섭을 성립시킨다. 이때 유키나가의 가신인 나이토 죠안(内藤如安)<ref>명측 기록에는 소서비탄(小西飛騨), 소서비(小西飛) 등으로 되어 있다. </ref>이 일본측 사절로써 베이징(北京)까지 오기도 했다. 그 결과 명의 사신이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봉한다는 [[만력제]](萬曆帝)의 칙지와 금인(金印)을 가지고 일본으로 당도했다. 책봉 내용은 과거 명이 [[알탄 칸]]의 선례에 따라 히데요시를 순화왕(順化王)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 이외에도 유키나가나 [[오타니 요시쓰구]] 등 화평을 주장했던 일본측 무장에게도 대도독(大都督), 유키나가의 가신들은 도독(都督) 지휘(指揮) 등 명의 군호를 받았다). 그런데 이는 히데요시가 명의 신하가 된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명에 요구한 화의 조건과는 다른 것이었다.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회보하는 단계에서 유키나가는 칙지를 읽는 임무를 명한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에게 내용을 살짝 바꿔서 읽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조타이는 칙지를 곧이곧대로 히데요시 앞에서 읽어버렸고, 강화 교섭은 결렬되었다. 교섭을 주도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사이쇼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요도도노]](淀殿) 등의 만류로 목숨은 건졌다.
 
[[파일:왜군 남원성 침공 작전도.png|섬네일|오른쪽|170px|[[남원성 전투]] 당시 일본군의 공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