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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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리나 스포르차 디 포를리 백작부인'''({{llang|it|''Caterina Sforza contessa di Forlì''}}, [[1463년]] ~ [[1509년]] [[5월 10일]])는 [[포를리]]의 백작부인으로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이다.
 
== 생애 ==
[[1473년]] 그녀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약혼함으로써 [[이몰라]]의 소유권을 되찾았으며, 그 도시는 리아리오 가문의 봉토가 되었다. [[1477년]] 이몰라에 의기양양하게 들어간 후,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프란체스코 5세 오르델라피]]로부터 포를리의 지배권을 빼앗고자 남편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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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라바르디노 성의 대리 성주인 톰마소 페오는 리아리오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였기 때문에 음모자들에게 성채를 인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백작부인은 음모자들에게 만일 자신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면 대리 성주를 설득해 성채를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인질로 남은 채 그녀 혼자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음모자들이 위협용으로 집중포화를 날리고 복수하겠노라고 외쳤음에도 그녀는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아직도 포로로 잡은 카테리나의 아이들을 성채 앞으로 끌고 가서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그녀는 성벽 위에서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자신의 [[여성의 성기|성기]]를 드러내 보이며,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낳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녀의 삼촌이자 밀라노 공작인 [[루도비코 일 모로]]가 보낸 군대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적들을 패배시키고 그녀의 모든 영토의 소유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반대하고 자신의 힘을 재확립시키게끔 했던 사람들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이 한 건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다른 나라에까지 ‘이탈리아 제일의 여자(프리마 돈나 디탈리아)’라는 별명을 얻어 칭송과 열광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강압적이고 오만한 통치를 펼쳤기 때문에 그녀의 지배를 받던 시민들과의 관계는 별로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과부가 된 그녀에게는 몇 명의 연인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자코모 페오]]와는 몰래 결혼하였다. 페오는 평소 그의 잔혹함과 오만함을 싫어했던 가신들에 의해 1495년 8월 27일 그의 아내의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카테리나는 암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한 그들의 가족들을 모두 사형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새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피렌체]] 사람들과 친분 관계를 맺었다. 1465년


그녀는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로 부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와 1497년에 비밀 결혼을 하였다.<ref name="메디치 가문 이야기 526">G.F.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7.9, p526</ref> 조반니는 1498년에 죽었지만,<ref name="메디치 가문 이야기 526"/> 카테리나는 루도비코 일 모로와 피렌체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사람들의 공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그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그녀의 아들 오타비아노 사이의 결합을 승낙하는 것에 대해 거절하자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더구나 이 일을 계기로 [[교황령]]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로마냐 지방을 정복 중이던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그녀의 영토에 욕심을 내게 되었으며, [[1499년]] [[3월 9일]] 리아리오 가문이 빼앗긴 이몰라와 포를리의 지배권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양도한다는 [[교황 교서]]가 반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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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공용분류}}
* [[스포르차 가문]]
 
== 각주 ==
<references />
 
{{기본정렬:스포르차, 카테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