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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로부터 안전해진 다음부터 고구려에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봉상왕 7년인 298년 가을에는 우박이 내려 농사를 망쳤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귀신이 출몰하고 객성(客星)이 달을 가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궁궐을 개축하고 자신의 조카 [[을불]](乙弗)을 죽이려 하는 등의 행위로 신하들의 불만을 샀다.
 
봉상왕 9년인 [[300년]]에도 괴이한 일은 계속되었다. 정월부터 지진이 나고, 6개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8월이 되자 왕은 15세 이상의 남녀<ref>창조리 열전에는 남녀가 아닌 장정을 뽑았다고 한다.</ref> 를 뽑아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더 궁핍해졌다.
 
이에 창조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간하였다. 이에 왕은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자 함이냐고 되물었다. 이에 창조리는 다시금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왕은 웃으며 "그대는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창조리의 말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