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제루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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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초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몰려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트빌가]]이다. 이들은 때로는 [[사라센]]과 때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중에 이들은 단순한 용병을 넘어서 남부이탈리아에서 정착하여 권력을 잡고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노르만 출신의 장군 [[로베르 기스카르]](루베르투 귀스카르루)와 그의 동생 로제르(후의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 디 시칠리아 백작|루제루 1세]])에 이르러 남부 이탈리아에서 작위를 인정받고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시칠리아]],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는 사실상 노르만족의 영토가 되었다.
 
== 생애 ==
=== 초기의 생애와 권력의 획득 ===
루제루 2세는루제루는 시칠리아 백작인 아버지 [[루제루 1세 디 시칠리아 백작|루제루 1세]]와1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아델레이데 델 바스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1101년]] 아버지가 죽자 시칠리아의 백작위는 형 [[시무니 디 시칠리아 백작|시무니]]에게 돌아갔으나 4년후 형도 죽고 말았다. 당시 루제루는 9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델레이데가 섭정을 맡았다.
 
[[1112년]] 성년이 되어 스스로 직무를 개시했으며 [[1117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의 딸 [[엘비라 데 카스티야]]와 결혼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루베르투 귀스카르루의 후손들인 자신의 사촌들에게서 조금씩 자신의 잇권을 얻어내고 영토를 확보해나갔다. [[1122년]]에는 칼라브리아를 모두 손에 넣었고 [[1127년]] [[풀리아 공작위|풀리아 공작]] [[굴리엘모 2세 (아풀리아)|굴리엘모]]가 자식없이 죽자 풀리아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비천한 가문이었던 [[오트빌가]]가 지배적인 가문으로 성장한 것을 시기하였고 [[교황 호노리오호노리우스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강력한 왕국이 들어서는 것이 [[교황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루제루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루제루는 강력한 군사력과 때로는 뇌물도 서슴지 않는 외교술로 결국 반대를 종식시키고 [[1128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2세는 루제루를 [[풀리아·칼라브리아의 공작위작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그리고 시칠리아를 통합하는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32세에 루제루는 유럽의 강력한 군주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으나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왕관이었다.
 
=== 시칠리아의 왕위 창설 ===
[[1130년]]초 교황 호노리오가호노리우스 2세가 죽자 교황 자리를 두고 투쟁이 벌어졌는데 두 명의 교황 후보자가 나서서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인 [[교황 인노첸시오인노켄티우스 2세|인노켄티우스]]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로타르 3세|황제 로타르]] 등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그의 경쟁자인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아나클레투스]]는 루제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제루는 아나클레투스로부터 시칠리아의 왕관을 받는 대가로 그를 [[대립교황|교황]]으로 지지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는 교황의 칙령으로 루제루를 [[시칠리아의 군주|최초의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하였고 [[팔레르모]]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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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란, 황제와의 투쟁 ===
이후 루제루는 10년동안 이탈리아에서 반란에 시달렸다. 베르나르도는 [[루이 6세|프랑스의 루이 6세]],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3세를 연합하여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와 루제루에 반대하는 연합을 제창하였다. 그러는 사이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루제루는 하나하나 반란을 진압했다. [[1132년]] 아풀리아의 반란에서 [[바리 (도시)|바리]]공 그리모알드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 탕크레디는 바리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듬해에는 [[로타르 3세]]가 로마에 와서 황제 대관식을 가졌는데 반란군들은 황제에게 군사를 일으켜 루제루에 대항하자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황제가 돌아가자 루제루는 반격에 나서 아들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앉혔다.
 
한편 로타르는 노르만족의 강력한 왕이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피사, 제노바, [[비잔티움 제국]]의 [[요한네스 2세|요한네스 콤네누스 황제]]와 연합하여 반 루제루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1136년]] 루제루를 공격하였다. 로타르가 이끄는 독일 연합군은 바로 [[이탈리아 반도]]의 본토 수도인 [[살레르모]]로 진격했고 루제루는 시칠리아에 남아 있었다. 살레르모는 곧 함락되었고 독일군은 남부 이탈리아를 유린했다. [[1137년]] 6월 [[바리 (도시)|바리]]가 함락되었고 교황과 황제의 연합군은 아풀리아를 거의 다 장악하였고 그 이후에 황제는 독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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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그의 왕국은 노르만인, 동고트인, 알란인, 사라센인이 섞여있는 다민족 국가였고 그는 모든 민족을 편견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었고 학문을 장려했다. 그의 치세 마지막 15년 동안 그는 팔레르모의 궁정에서 당대의 이름난 석학들과 함께 보냈다. 시칠리아는 이슬람 문화, 비잔티움의 그리스 문화,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 라틴문화가 뒤섞여 격조높은 문화를 만들어냈다.
 
루제루는 제2차 십자군으로 유럽이 온통 들떠 있을 때에도 이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왕국의 백성이 대부분 이슬람교도인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어머니 [[아델레이데 델 바스토|아델레이데]]가아델레이데가 [[예루살렘 왕국]]의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보두앵]]과 결혼했다가 다시 쫓겨왔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일:DSC00533 - Cattedrale - Tomba di Ruggero II (1095-1154) - Foto G. Dall'Orto 28-09-2006.jpg|섬네일|왼쪽|200px|루제루의 무덤 (팔레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