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시무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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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슈 번주 시절 ===
[[호에이]] 2년([[1705년]]) 맏형이자 3대 기슈 번주인 [[도쿠가와 쓰나노리|쓰나노리]]가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둘째 형인 [[도쿠가와 요리모토|요리모토]]가 4대 기슈 번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부친인 미쓰사다, 반년 후 요리모토가 연달아 사망하면서 22세의 나이에 기슈 번 5대 번주로 취임하였다.<ref> 쓰나노리, 요리모토, 미쓰사다의 이러한 잇따른 죽음은 부자연스러운 점이 많아 일각에서는 요시무네가 이들을 모두 암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ref> 이 때 쇼군 쓰나요시로부터 편휘를 하사받아 비로소 '''요시무네'''(吉宗)로 개명하였다. 호에이 3년([[1706년]])에는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伏見宮貞致親王)의 딸 사나노미야 마사코 여왕(真宮理子女王)을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호에이 7년([[1710년]]) 사망하였다.
 
같은 해 4월 기슈에 입성한 요시무네는 악화된 번의 재정을 개선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대대적인 번정(藩政) 개혁에 착수하였다.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절약에 앞장섰으며 통치 기구를 간소화하는 등 여러 정책으로 두 형과 부친의 장례 비용, 바쿠후로부터 차용한 10만 냥 금의 부채, 재해 복구비, 번 지폐의 정지 등으로 악화되던 번의 재정이 상당 부문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거성인 와카야마 성 앞에 '소원 상자'를 설치해 백성들로부터 직접 청원과 호소를 들으며 문무를 장려하고 효행을 표창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두 아들들인 장남 나가토미마루(長福丸, [[도쿠가와 이에시게]]), 차남 고지로(小次郎, [[도쿠가와 무네타케|다야스 무네타케]]는 요시무네가 기슈 번주로 있던 시절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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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호]] 원년([[1716년]])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래로 내려 온 남자 후계자의 혈통이 끊기자, 히데타다 혈통 이후로 쇼군 계승권이 있던 [[고산케]]의 당주들 중 한 명인 요시무네가 방계 가문으로는 처음으로 쇼군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요시무네가 쇼군에 취임할 당시 히데타다의 증손이자 다테바야시 번주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살아 있어 아직 히데타다의 혈통은 끊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요타케의 영지인 다테바야시 지방 내에서 무거운 조세 부담으로 [[잇키]](一揆)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번주로서의 기요타케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이미 고령에 남자 후계자도 없어 기요타케는 쇼군 후보에서 제외되었다.<ref> 이 외에도 히데타다와 측실 시즈(静)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호시나 마사유키]]의 후손이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어 기요타케의 사후에도 존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즈 7대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히로]] 사후에 이르러 히데타다로 이어지는 남계는 단절되었다.</ref> 또한 요시무네의 [[고산케|기슈 도쿠가와 가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이에야스의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시조로 하는 [[고산케|오와리 도쿠가와 가문]]보다 계승 서열이 낮았으나 요시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대상으로 더 가깝다는 명목 하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은 정당화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점들 때문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天英院)과 [[도쿠가와 이에쓰구|이에쓰구]]의 생모 [[겟코인]](月光院) 사이를 둘러싼 모종의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 교호 개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