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녀 요크의 엘리자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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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에드워드 4세]]와 지방귀족 출신인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에서 장녀이자 맏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와 고모인 서퍽 공작부인의 이름을 따 '엘리자베스'로 지어졌다. 5세때 [[에드워드 4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노섬벌랜드 백작 존 내빌의 아들과 약혼하였으나 노섬벌랜드의 배신으로 취소되었다. [[1475년]] [[프랑스]]의 도팽 [[샤를 8세|샤를]]의 아내로 제의되었으나 도팽의 아버지 [[루이 11세]]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 웨일즈 공이 [[에드워드 5세]]로 즉위하였다. 에드워드 5세가 미성년이었으므로 그의 계부(季父)<ref> 삼촌은 주로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남자 형제를 이르는 말로 이때 유부남이었던 글로스터셔 공을 칭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한편, 계부(季父)는 아버지의 막내 아우를 가리키는 말이니 에드워드 5세의 계부가 바로 글로스터셔 공작 리처드이다.</ref>인 글라우스터 공작 리처드가 왕의 후견인이자 섭정이 되었다. 곧바로 리처드는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외척 우드빌가의 교제를 끊기위해 온갖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일단 대관식을 위해 루드로 ([[Ludlow]])<ref>웨일즈 공의 거주지</ref>에서 [[런던]]으로 가고 있던 [[에드워드 5세]]를 가로채 표면상 보호를 위해 [[런던 탑]]에 연금시켰다. 당시 왕대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장녀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딸들과 작은 아들 요크 공작 리처드와 [[웨스트민스터 사원]]안에 피신처([[Sanctuary]])에서 있었는데 리처드는 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요크 공작 리처드도 왕과 같이 있어준다는 명분으로 런던 탑에 보내넣었다.
 
두 달뒤인 [[1483년]] [[6월 22일]],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이 무효되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서자로 전락하였다.<ref>[[에드워드 4세]]가 이미 다른 귀족과 정식 약혼을 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자녀들은 적법한 상속자가 아니란 주장이 의회에서 받아들여져 글라우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인정하는 [[Titulus Regius]]란 법안을 낸다.</ref> [[7월 6일]] 리처드는 공식으로 국왕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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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년 장남 아서(당시 15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왕세자의 거주지를 밖에 두는 전통에 따라 러들로 캐슬로 나간 5개월 후 1502년 사망한다. 이에 낙담한 헨리 7세는 슬픔에 잠겨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왕위계승에 대한 걱정으로 황폐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왕에게 헨리 7세 자신도 외동아들이지만 살아남아 왕이 되었고, 부부에게는 아직 아들과 두 딸이 남아있으며, 둘 다 아직 젊으니 아기를 더 낳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위로했다.
 
[[1503년]] [[2월 2일]] 막내딸 캐서린 공주를 낳았지만 며칠 후 사망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생일인 [[2월 11일]]에 분만후감염<ref> 흔히 이가 산욕열(Puerperal Fever)로인해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 분만후감염(Postpartum Infection)이었다</ref>으로 3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인 헨리 7세는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은둔지로 몰래 떠나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검소하다고 소문난 헨리7세 였지만 그녀를 위해 화려한 장례식을 열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