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언양김씨 정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35번째 줄:
}}
 
'''열녀 언양김씨 정려'''(烈女 彦陽金氏 旌閭)는 [[세종특별시]] [[연동면]] 송용리에 있는 정려이다.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의 향토문화유산]] 제21호로 지정되었다.<ref>세종특별자치시 고시 제2014-111호,《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세종특별자치시 시보 제93호, 44면, 2014-09-30 </ref>
 
== 개요 ==
열녀 언양김씨 정려(烈女 彦陽金氏 旌閭)는 조선시대 열녀 언양김씨의 열행(烈行)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銘旌)을 현판(懸板)으로 걸어놓은 정문(旌門)이다.
 
언양김씨는 김정(金淀)의 딸로 16세에 장응헌(張應軒)과 혼인하였다. 평소에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로 쳐들어오자 남편에게 시아버지와 자식들을 데리고 뒷문으로 피하게 한 뒤 자신은 앞문으로 나와 적들을 유인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을 피해 달아나다 여의치 않자 현재 연동면 예양리 북쪽의 미호천 중류에 있던 황단이 나루에서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김씨의 행동에 감복한 청나라 군사들은 시신을 건져 강변에 묻어주고 나무에 그 내용을 적어 무덤 앞에 세워주었다. 그 후 마을을 공격하려던 청나라 군사들은 나무에 쓰여 진 내용을 보고는 비켜갔다고 한다.
 
언양김씨의 열행에 대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조정에 글을 올려 1638년(인조 16)에 명정을 받았으며 1793년(정조 17)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내부 중앙에는 언양김씨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아래로 1793년(정조 17)과 1809년(순조 9)에 작성한 2개의 정려기(旌閭記)와 1844년(헌종 10)과 1965년 고치서 지은 내용을 적은 중수기(重修記) 2개가 남아있다. 열녀 언양김씨 정려 앞에는 [[연동 송용리 마애여래입상]](燕東 松龍里 磨崖如來立像,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4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