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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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권과 속권의 충돌 ===
1073년 그레고리오 7세가 높은 지지속에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추기경 시절에 교회 개혁을 주도하였던 숨은 실력자로 정렬적인 개혁가였다. 그는 자신이 교회 정화를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이 투철하였고,<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0</ref> 교회 부패와 타락의 근본원인은 성직매매, 성직자의 결혼, 세속 군주의 성직자 서임권 행사로 판단했다. 특히 세속 군주의 서임권 행사를 완전히 근절시켜야만 개혁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0</ref> 이를 1075년 '교황훈령'을 통해 분명하게 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교회 개혁을 주도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으며 세속 권력으로 부터 교회의 독립과 개혁에 대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왔다. 따라서 교황에 즉위한 후에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교황과 황제간에 서임권 투쟁은 밀라노 대주교 임명을 놓고 본격적으로 표면화 되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중요한 교구였다.교구였기 때문에<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1</ref> 교회법에 따른 주교 선출과 성직서임이라는 개혁의 원칙을 현실화 하기 위해서는, 어느곳 보다도 밀라노에서 관철되어야만속인의 했기성직서임 때문에금지를 결코관철시켜야만 물러설 수 없었다했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31</ref> 그래서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모후의 무능한 섭정으로 왕권이 약해지기는 하였으나 1075년 작센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며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대해 반대를 분명하게 했으며 밀라노 대주교 임명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교황의 서한을 받고 이를 거부하였다. 1075년 6월에 하인리히 4세는 밀라노, 페르모, 스폴레토 주교를 임명하자 교황이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황제는 1076년 1월 보름스 종교회의를 열고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그리고리오 7세는 사순시기 종교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제국의 봉신들에게 황제에 대한 충성과 복종 의무를 해제하는것으로 응수하였다. 아울러 하인리히 4세를 도와주는 귀족이나 사제도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 카노사 굴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