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9번째 줄:
 
이후 무제는 죄수들을 사면하고 기병과 불량배들을 더 많이 모아 만든 지원병을 보내 이광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이 두 번째 원정에서 이광리는 6만 명, 소 10만 두, 말 3만여 필, 나귀·노새·낙타 만 필에 달하는 더 큰 대군을 거느리고 돈황을 떠났으며, 이사성을 함락한 후 좋은 말을 선별할 집구교위 2명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한나라의 대군을 보고 소국들이 군량을 내어주었고, 군량을 주지 않는 윤두(侖頭)는 함락하고 도륙했다. 이번에는 시간을 끌다가 대완의 계략을 당할까봐 욱성을 우회해 대완을 직접 공격해, 이사성으로 통하는 물길을 돌리고 포위 공격하여 외성을 함락하고 전미(煎靡)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대완의 귀족들이 모의해 무과를 죽이고 그 머리를 가지고 한나라 진영으로 가서 무과의 머리와 좋은 말을 주는 조건으로 화약을 청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을 다 죽이고 [[강거]]와 연합해 싸우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강거는 아직 진군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광리는 대완에 있는 중국인들이 우물을 파주고, 강거가 대완과 연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해 화약을 맺고, 좋은 말 수십 필과 중하급 말 암수 3천여 필을 얻고 대완의 귀족으로 친한파인 매채(昧蔡)를 새 왕으로 세웠다. 그래서 대완의 내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원정군을 파하고 돌아왔다.
 
이 때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지자 평소 이릉을 시기하던 이광리는 이릉의 구족을 멸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이릉을 변호하는 [[사마천]]을 이릉과 한 패라고 무함하여 결국 극형을 받게 한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해야 할 의무 때문에 사형 대신 궁형을 택했다.
 
한편, 별군을 이끌고 욱성에 이른 교위 왕신생(王申生)과 전 [[대홍려|홍려]] [[호충국]] 등 천여 명이 욱성의 공격으로 지고 왕신생과 호충국은 전사했으며, 일부 병력만이 살아서 도망쳐 본대로 왔다. 이에 수속도위 [[상관걸]]에게 욱성을 치게 하니, 욱성의 왕이 강거로 달아났다. 상관걸은 강거까지 추격했고, 대완이 졌다는 소식을 듣자 강거에서 욱성의 왕을 상관걸에게 내어주었다. 상관걸은 욱성의 왕을 이광리에게 보냈으나, 호송병 중 조제가 욱성의 왕을 죽였고, 조제와 상관걸은 함께 이광리에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