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7번째 줄: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고 6살에 어린 하인리히 4세가 등극하였는데 섭정을 맡은 모후는 정치적으로 무능했다. 귀족들에게 휘둘리며 황제의 권력은 약해졌고 교회에 대한 황제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로마의 개혁파 추지경들은 교회가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058년 교황이 사망했을 때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로마 귀족들이 좀 더 발빠르게 움직여서 새로운 교황으로 베네딕토 10세를 옹립했다. 추기경들은 그를 인정치 않고 시에나에서 니콜라오 2세를 선출했다. 니콜라오 2세는 고드프루아의 군대를 이용해 로마에서 시가전을 벌인 후 베네딕토 10세를 축출하였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8.5 p212</ref>
 
1059년 4월 13일24, 교황 니콜라오 2세(1058~61)는 교회개혁을 단행했다. 여러가지 개혁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교황선출권을 추기경들에게 부여하는 조치였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세속권력에 종속되어 있던 교회를 독립시켜서 기존에 황제나 로마 귀족들이 부당한 간섭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평신도와 성직자에게 선출권이 있었으며 신임교황은 황제에게 맹세하고 나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이는 824년 로타르 1세에 의해 발의되어서 오토 대제 시절에 개정합의된 사항이었다사항이었었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8.5 p214</ref>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세속권력에 종속되어 있던 교회를 독립시켜서 기존에 황제나 로마 귀족들이 부당한 간섭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 비호 세력 확보 ===
교회의 과감한 개혁에 대해 독일 황실과 로마 귀족들이 반발할 것을 대비하여 [[노르만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비호세력으로 삼았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29</ref> 당시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신생국가의 면모를 갇추고 있었다. 그런데 양진영은 지난 1053년 치비타베 전투이후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8.5 p200</ref> 1059년 8월, 멜피에서 로마와 노르만족 사이에 화해를 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으며 [[로베르 기스카르]]와 [[아베르사의 리샤르|리샤르]]를 공작으로 책봉하여 교회의 봉신으로 삼았다.
 
로마 교회는 파타리노(patarino) 운동이라 불리우는 밀라노의 민중 종교개혁 운동세력과 접촉하였다. 타락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요구하던 이들의 운동은 혁명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다소 과격하였다. 교황은 이들을 지지하고 부추겨서 황제가 임명한 주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ref>J모랄,W몰란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혜안 2016.1.25 p39</ref> 이후 교황특사를 파견하여 밀라노 대교구장을 교황청에 종속시킴으로써 밀라노 지역에 대한 독일 황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