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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과감한 개혁에 대해 독일 황실과 로마 귀족들이 반발할 것을 대비하여 [[노르만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비호세력으로 삼았다.<ref>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집문당 1989.5.20 p229</ref> 당시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남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신생국가의 면모를 갇추고 있었다. 그런데 양진영은 지난 1053년 치비타베 전투이후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ref>존 줄리어스 노리치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8.5 p200</ref> 1059년 8월, 멜피에서 로마와 노르만족 사이에 화해를 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으며 [[로베르 기스카르]]와 [[아베르사의 리샤르|리샤르]]를 공작으로 책봉하여 교회의 봉신으로 삼았다.
 
로마 교회는 파타리노(patarino)<ref>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까치글방 2000.4.20 p141.....파타리노 운동이란파타리노란 타락한 대주교와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성직자들이 첩을 두거나 결혼하는것을 허용했던 당시의 교회 제도에 반대하여 1058년경 기술자, 상인, 농민들과 같은 평신도들이밀라노에 조직한 단테의 회원. 파타리노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이들이 밀라노의 ㅎ나 구역인 파타리아(Pataria) : '넝마'라는 뜻의 이 지역 방언)에서 집회를 가졌기 때문이다.</ref> 운동이라 불리우는 밀라노의 민중 종교개혁 운동세력과 접촉하였다. 타락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요구하던 이들의 운동은 혁명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 다소 과격하였다.<ref>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의 빛과 그림자> 까치글방 2000.4.20 p141</ref> 교황은 이들을 지지하고 부추겨서 황제가 임명한 주교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ref>J모랄,W몰란 <중세 유럽의 정치사상> 혜안 2016.1.25 p39</ref> 이후 교황특사를 파견하여 밀라노 대교구장을 교황청에 종속시킴으로써 밀라노 지역에 대한 독일 황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 서임권 투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