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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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령부|유엔군]] 측 [[주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있어 이를 제대로 관측할 수가 없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lang|en|Arthur George Bonifas}}, [[1943년]] [[4월 22일]]생) [[대위]]를 위시하여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lang|en|Mark Thomas Barrett}}, [[1951년]] [[6월 9일]]생) [[중위]] 등 2명과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ref>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 4명 등 11명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린 [[미루나무]]의 전지작업을 하는 남한대한민국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와 다른 장교 1명, 그리고 15명의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미루나무의 위치가 유엔군 측의 관할에 속했기에 보수작업을 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보니파스 대위는 경비중대장 직권으로 작업을 계속 지시하였다. 인근 초소의 인민군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 20여명은 경비 [[병력]]을 요청받고 [[트럭]]을 이용하여 도착하였다. 박철 중위의 작업 중지 재요구를 보니파스 대위가 거부하자 박철의 공격명령에 따라 인민군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들은 트럭에 실어 가지고 온 [[곡괭이]], [[몽둥이]]와 함께 노동자들이 작업에 쓰려고 가져왔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여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이송 중 사망하였으며, 주한 미군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 4명, 국군 장교와 [[부사관]]과 [[병사 (군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고,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11/03/201011030500008/201011030500008_1.html |제목=다큐멘터리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⑦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 8·18 도끼만행 사건 |저자=오세영 |출판사=신동아 |날짜=2010-11-01 |확인날짜=2014-10-1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006140742/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0/11/03/201011030500008/201011030500008_1.html |보존날짜=2014-10-06 |url-status=dead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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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파일:DMZ 10.JPG|섬네일|200px|판문점 내 남북 경계]]
폴 버니언 작전 종결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 주석 직에 있던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전달했다. 처음에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가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사건 당사자인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남한과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이후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되었으며, 경계 밖 상대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는 철거되었으며, [[콘크리트|혼응토]]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였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에는 근처에 있는 캠프 키티호크({{lang|en|Camp Kitty Hawk}})가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