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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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는 공격 개시일을 [[10월 23일]]로 정하고 주공을 북쪽의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로 택했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오후 9시 30분 영국군의 폭격기로부터 시작됐고 곧 이어 900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독일 방어진지의 지뢰와 철조망 조각들은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포탄 폭풍에 병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포사격 수초 만에 독일 통신시설이 박살이 나버렸다. 통신이 불통인 상황에서 아프리카 군단의 시투메는 뷔휘팅 대령을 대동하고 전선을 확인하기 위해 출발했다. 포연과 모래먼지 속에서 작렬하는 탄막을 뚫고 달리던 지휘차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말았다. 총탄을 맞은 뷔휘팅이 절명하고 시투메는 그 충격으로 심장병이 발작해 죽고 말았고 시투메 대장은 실종으로 보고됐다. 반면 영국군도 지뢰 때문에 예상 밖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고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지뢰와 같이 묻어둔 110㎏ 짜리 폭탄은 1개 소대 장병 30명을 순식간에 하늘로 날려버렸다. 제42 스코틀랜드 연대의 1개 대대에서는 새벽이 오기 전까지 7명의 향도 장교가 사망 또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영국군에 이 전투 최대의 위기는 [[10월 24일]] ~ [[10월 25일]] 밤에 벌어졌다. 엘 알라메인 전 지역이 거대한 살육장으로 변한 아비규환 속에서 공격하는 영국군이나 방어하는 독일군 어느 쪽도 승패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25일까지 영국군 보병은 6000명6,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전차는 130대가 파괴됐다. 몽고메리의 참모장과 제10·제30군단장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보고 몽고메리에게 작전을 중지하고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이렇게 응대했다. “아직도 사용 가능한 [[전차]]가 900대나 있다. 그것들은 소모품이다.” 25일 에르빈 롬멜은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격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탄약·전차 연료가 바닥났다.
 
[[10월 26일]] 영국의 제9사단(오스트레일리아군)이 북쪽에서 8km 의 지뢰밭을 돌파했다. 롬멜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돌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롬멜은 예비인 제90경기갑사단을 투입하고 남방 50km 지역에 있던 제21기갑사단에 북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롬멜은 북쪽에 투입한 사단들이 더 이상 급한 곳이 있다 하더라도 되돌아갈 연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롬멜이 정예부대를 북쪽에 투입한 사실을 간파한 몽고메리는 북쪽의 주공부대를 현재 위치에서 남쪽으로 8km 지점인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경계선 쪽으로 이동시켰다. [[11월 2일]] 오전 1시, 영국군의 대포 360문이 사막의 싸늘한 밤을 찢었다. 강철 방패 같은 탄막이 3분 간격으로 90m씩 앞으로 나아갔고 엄청난 포탄이 지뢰와 철조망을 헤집어 놓았다. 오전 5시30분 전차가 길을 열어놓은 보병 사이를 뚫고 전진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돌진해오는 영국군 제9기계화여단의 전차를 차례로 격파했다. 제9기계화여단은 적진에 돌입해보지도 못하고 뭉그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몽고메리는 2개 여단의 전차를 새로 투입했고 롬멜도 2개 기갑사단으로 하여금 양측에서 반격토록 했다. 전차와 전차의 불꽃 튀는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전투가 끝날 무렵 독일군의 전차는 35대로 줄어들었다. 피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롬멜의 눈앞에 다가왔다.
 
전투가 말기로 치솟을 무렵 추축군도 피해도 컸지만 영국,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 역시 피해가 막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3만 명에 포병 전력은 전체의 88%가 괴멸되었다고 한다. 영국군의 사상자는 1만 5,000 명이었으며 특히 기갑 전력의 피해가 극심하여 상당수의 영국군 기갑 부대가 아예 전멸해 버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롬멜 장군은 어떻게 하든지 나머지 병력을 리비아로 귀환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고 후퇴를 개시했다. 우선 서쪽으로 400km 떨어진 샬롬파 할파야 고개까지 후퇴하여 그곳에 매복하여 자신의 군대를 추격하는 영국군을 기습하여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줄 기회는 몇번이나 있었지만 전투 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독일군은 튀니지로 무사히 후퇴한다. 그러나 [[미국]], [[영국]], [[자유 프랑스]] 연합군이 [[11월 8일]] [[모로코]]의 [[오랑]]과 [[카사블랑카]]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이 시작되자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까지 장기후퇴를 결심했었던 롬멜은 더이상 북아프리카 전선을 추축국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철수는 절대 안된다는 히틀러의 말을 무시한 채로 [[11월 2일]]에 철수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히틀러도 [[11월 3일]]에 이 철수를 인정한다. 결국 추축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