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전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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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의 충격적인 패배는 알려지지 않았고, 곧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llang|de|Deutsches Afrikakorps}}, '''DAK''')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리비아의 [[트리폴리 (리비아)|트리폴리]]로 보내졌다. 전선을 유지하라는 간단한 명령을 받았지만, 롬멜은 엘 아게일라에서 공세 작전을 발진시켰다. 최초로 투입된 독일군은 [[독일 5 경기갑 사단|5경기갑 사단]]의 수색 대대였는데, 아직 본대가 다 도착하지 않은 시점에서 반격을 개시한 수색 대대는 동원 가능한 모든 차량의 뒤에 널빤지를 달아 먼지를 일으켜 대규모 전차 부대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고, 영국군이 이에 속아 넘어갔다.<ref>당시 영국군에게는 불행히도 이탈리아군 격파의 주역들이 [[그리스]]에 파견된 뒤라, 약화된 상태였다.</ref>
 
롬멜이 3월 말 롬멜이 개시한 첫 번째 공격에서 [[키레나이카]]에서 병력이 많이 빠진 영국군은영국군을 강타해강타한 [[토브룩 공방전]]을 제외하면 연합군을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의 항구 도시 [[살룸]]에서 압박했고, 양측은 원래 위치까지 오고 가는 공방전을 벌였다. 한편 지중해 지역에서는 [[3월 28일]] [[그리스]] 마타판 곶 근해를 공격해 전함 1척과 5척의 구축함, 순양함을 격침시켜 이탈리아 함대를 불구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세는 1941년 4월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전선|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공방전|그리스를 침공]]하면서 흔들리게 되었고 [[크레타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의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 장악은 종결되었다.
 
한편 지중해 지역에서는 [[3월 28일]] [[그리스]] 마타판 곶 근해를 공격해 전함 1척과 5척의 구축함, 순양함을 격침시켜 이탈리아 함대를 불구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세는 1941년 4월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전선|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공방전|그리스를 침공]]하면서 흔들리게 되었고 [[크레타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의 지중해 지역의 제해권 장악은 종결되었다.
 
4월 말 독일군이 이집트 국경에 당도해 오코너 장군이 생포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토브룩]] 항에 고립되었다. 이에 웨이벌의 지휘 아래에 영국군이 5월에 새로운 공세를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6월 2차 공세를 실시했으나 이마저 실패해 다시 한 번은 전선(戰線)은 엘 아게일라에 형성되었고 7월 웨이벌이 해임되고 [[클로드 오킨레크]]가 취임했다. 궁지에 몰린 연합군은 서부 사막군을 [[영국 8군|8군]]으로 재조직하면서 당시 영연방 국가였던 몇 개국 군대로 편성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및 영국령 인도 식민지군, 뉴질랜드 육군, 남아프리카 공화국 육군을 비롯하여 [[자유 프랑스]] 측에 서는 [[마리 피에르 쾨니히]] 소장의 [[프랑스 외인부대]] 여단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