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이치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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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성장기 ===
[[도쿄부]] [[도쿄시]](현 [[도쿄도]] [[다이토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 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사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니혼대학교니혼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으나 중퇴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민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 정치 입문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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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를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하였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으면서 파벌회장과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하타 쓰토무]]를 옹립하면서,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는 등의 영향으로, 파벌의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하타 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다하타 파는 [[일본 경제기획청|경제기획청 장관]]과 [[일본 과학기술청|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하타 파는 비주류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하타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표를 던지고, 16명이 결석하는 이른바 반역이 일어나면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하타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자 [[55년 체제]] 붕괴의 서장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하타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 (일본)|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일본)|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내각관방장관]]으로 [[일본총리대신 수상관저관저|관저]] 주도의 정치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사의를 표명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의 탈당을 유도하며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었고 연립여당은 [[하다하타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민주사회당 (일본)|민사당]] 등이 [[일본사회당|사회당]]을 배제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인 [[하다하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하타 간에 미묘한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다하타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면서 하다하타 내각은 총64일간의총 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하타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으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 신진당 시대 ===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의 움직임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창당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자신은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하는 의석 19석을 크게 넘은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하타와 격돌하게 되었으며, 하다를하타를 꺾고 오자와가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내에서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중의원 총선거]]에서 신진당은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이 감소한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고, 하다하타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였다.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하타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 (일본)|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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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 탈당 이후 ===
 
2012년 7월 12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을 탈당했다. 그 후 '[[국민 생활이 제일당제일]]'이란 이름으로 신당을 창당하였으나, 이내 [[일본 미래당일본미래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후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일본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맞았다. 오자와 자신은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자진 탈당하였다.
 
=== [[일본 미래당일본미래당]] 탈당 이후 ===
[[민주당 (일본, 1998년)|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오자와는 다시 [[일본 미래당일본미래당]]에 복당, [[일본 생활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나, 2014년 9월 4일 자신의 [[국민대학교]]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 수여식 등에 참여하며<ref>[http://www.kookmin.ac.kr/site/ecampus/new/plus.htm?mode=view&num=1071&page=&pPart=&pKeyword=&pGroup=&pGroup2= 국민대,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에 명예박사 학위수여 ]</ref>, 꾸준히 [[대한민국]]에 방문하는 일본 정치인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