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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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10월]]에 남베트남에 수립된 나라로, 초대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였고, 베트남 공화국이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고위 관료 및 군대 중추는 프랑스 치하에서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정통성 문제에서 북부의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에 밀렸다. 이는 태생적 한계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국체(國體) 전반이 과거 프랑스의 괴뢰국이었던 베트남국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상태였다는 점에서도 문제점이 지적됐다.
 
1956년 응오딘지엠은 토지 개혁을 실시했으나, 이는 토지 몰수가 아닌, 소작료 제한책에 그치는 개혁이었기 때문에 지방 농민의 삶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러한 소작료 인하는 오히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월맹 게릴라 조직이 남부 일부 지역에서 실시했던 소작료 인하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소작료를 강제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농민의 삶은 이전보다 후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과로 소작 쟁의가 끊이질 않았으나,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 조직은 이를 파악하여 소작농과 빈민을 규합하였고, 그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성립되었다않았다.
 
한편,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 조직은 이를 파악하여 소작농과 빈민을 규합하였고, 그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성립되었다.
응오딘지엠의 정책에 미숙성을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은 행정 고문관을 보내 농촌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농민의 반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심각한 부패는 국민 단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되었다.
 
응오딘지엠의 정책에 미숙성을 이미 알고 있던 미국은 행정 고문관을 보내 농촌 통제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농민의 반감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심각한 부패는 국민 단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 게릴라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소작농을 탄압했고, 이는 전체적인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또한, 군부도 점점 응오딘지엠에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1963년에 군부 실세이자 군사 최고 고문이었던 즈엉반민이 쿠데타를 감행하였고, 응오딘지엠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권좌를 잡은 즈엉반민도 다른 군부에 의해 쿠데타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연이은 쿠데타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63년에 군부 실세이자 군사 최고 고문이었던 즈엉반민이 쿠데타를 감행하였고, 응오딘지엠은 살해되었다. 그러나, 권좌를 잡은 즈엉반민도 다른 군부에 의해 쿠데타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연이은 쿠데타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기나긴 혼란 끝에 응우옌반티에우가 1966년에 군부의 지지를 받는 데에 성공하였고, 1967년에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베트남 공화국의 행정 혼란은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정부패, 행정 무능, 권위주의 등의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다. 특히, 미군, 대한민국 국군을 비롯한 수많은 지원군이 베트남 공화국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베트남 공화국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최악이었기에 게릴라 군대에 불과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빈번하게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