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교회 대분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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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2세(1464~71)와 식스토 4세(1471~84)는 선거 공약으로 공의회 소집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ref name="네이버 교황사전">[네이버 지식백과]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 열여덟 번째 공의회 (교황사전)</ref><ref>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374</ref> 교황 율리오 2세 역시 공약 이행을 미루다가 캉브레 동맹전쟁의 적대국인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프랑스의 추기경들과 1511년 9월 10일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1512년 5월 3일 라테라노에서 공의회를 개막하였다.<ref name="네이버 교황사전" />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단죄하였다. 그 후의 교황들은 공의회 지상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공의회 개최를 몹시 기피했다. 이러한 불안은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응하기 위한 공의회가 적시에 개최되지 못하여 종교개혁의 흐름이 유럽으로 넒리 퍼지게 만들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공의회수위설 [conciliarism, 公議會首位說] (두산백과)</ref>
 
[[종교 개혁|종교개혁]](1517년)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가 소집된것은 1545년이 되어서였고 그나마 개신교도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 개최 요구는 꾸준히 있었다. 황제인황제 [[카를 5세]](생몰 1500~58)도 [[교황 클레멘스 7세]](1523~34)에게 공의회 소집을 수차례 요구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트리엔트 공의회 [Council of Trient] (두산백과)</ref> 그러나 교황은 이를 정치적인 압박으로 받아들였고 교황권이 공의회에 종속되는 것을 꺼리며 회피했다.
 
=== 콘클라베 ===